1, 세계질서의 변화와 「경제 논리」극복의 과제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체제의 몰락은 이념과 체제의 벽을 붕괴시켰다. 1989년 12월에 열렸던 미ㆍ소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는 이념의 양극화 현상과 그를 떠받치고 있었던 군사적 대치상태를 털어버리는 탈이념, 탈냉전선언을 함으로써 근 반세기에 걸친 얄타체제를 청산하고 이른바「신 국제질서」의 새 시대를 열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이미 한발 앞서 공산주의의 황혼을 조양 하면서「인간정부의 마지막 형태」로서의 자유민주주의 승리를 선포하여 파문을 던졌다. 이후 국제정치는 기존의 군사, 정치문제 우선에서 경제문제 우선으로 그 큰 축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무엇보다 세계경제가 하나의 자본주의경제로 통합되면서 몰고 온 변화는 엄청난 것이었다. 세계경제의 개방화와 통합화는 과거의 국민국가 단위의 경제활동과 국가의 역할을 약화시키면서 국가 간의 경제활동에 상호의존을 높이고 동시에 이들 간의 무한경쟁을 야기시켰다. 오늘의 변화추세로 볼 때 향후 출현할 21세기 지구촌이 자본의 무한대팽창욕구와 정보혁명의 결과로 점차 국경을 초월하는「글로벌 경제권」을 재편될 것임은 이제 누구도 의심치 않는다.
우선 이미 진행 중인 세계화, 국제화, 개방화의 가시적 변화만 점검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세계무역기구 (WTO)의 출범은「국경 없는 경제」와 자유무역질서를 향한 향진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미 세계 자본주의의 총아로 등장한 다국적, 초국적 기업을 비롯해서 유럽연합(EU), 북미자유무역지역(NAFTA)등 지역 블럭으로 편성된 초국가적 실체들이 급속히 부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과거 중앙집권적 국가의 품속에 머물러 있었던 도시, 지방과 지역이 그 고유성과 독자성을 발판으로 크게 대두되면서 이제 국가를 넘어 세계와 호흡하며 경제적 교류와 외교를 일삼고 있다. 말하자면 세계화와 지방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숨 가쁘게 진행되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크게 부상하고 있는 것이「경제의 논리」이다. 무한경쟁, 국가경쟁력, 자유주의 생산성, 국제적 효율이 크게 강조되고 전후 오랫동안 여러 나라를 풍미하던 사회적 형편, 복지, 공동체 등의 가치는 급격하게 퇴조하고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은 범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세계화는 생산성의 증강을 통해 인류의 장래에 밝은 빛을 던져 줄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러나 경제논리를 앞세우는 세계화는 자유경쟁과 혁신을 통하여 총량적으로 인류에게 더 큰 물질적 복지를 제공할 수 있을지 몰라도「앞선 자」와「뒤진 자」의 격차를 크게 벌리고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킬 개연성이 매우 크다. 세계화 추세에 성공적으로 편승한 나라나 산업부문, 직종, 계층, 개인은 승승장구할 것이나 그렇지 못한 나라나 산업부문, 직종, 계층, 개인은 영영 헤어나기 어려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 전망된다. 노동시장에서도 핵심노동 노동자와 사양부문의 노동자간의 격차를 크게 벌려 양극화와 파편화가 다양하게 중첩 진행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앞으로 이러한 경제, 사회적 양극화와 불균형을 줄이고 정치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일이 국가에게 부여된 큰 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화 시대에 국민국가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사회경제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옛 같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세계화를 경쟁과「경제의 논리」의 차원으로 좁게 정의하기보다, 보다 먼 눈으로 또 긴 호흡으로 이를 포지티브 섬(positive sum)의 차원으로 또 사회문화적 차원으로 승화시킬 때 이야기는 크게 달라 질 수 있다. 참된 의미의 세계화는 인류 간에 경쟁 못지 안게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인구, 자원, 식량, 무기 등 인류의 공존을 위한 국제협조의 지평은 무한히 넓다. 생태계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나 에이즈 퇴치를 위한 국제적 협조도 바로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경제적 이익이라는 협애한 개념에서 벗어나「삶의 질」에 대한「전 인류적」관점을 21세기의 세계관으로 내면화하는 문제가 오늘을 사는 우리 인류의 크고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남북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의미가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군사, 정치적 차원의 세계질서의 모습도 가벼이 보고 넘길 수 없다. 냉전이 끝났다고 해서 핵 시대가 종언을 고한 것은 아니다.
미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들은 아직도 가공할 수준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핵개발기술의 보편화와 안보를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제체제의 무정부적 상태로 인하여 적지 않은 나라들이 핵 확산의 유혹에 빠져 있다. 또한 냉전의 종식은 오히려 제3세계국가들에서 그리고 냉전의 유산으로 해체된 국가에서 적잖은 무력갈등을 낳고 있다. 인종과 종교 등 문화적 요인이 새로운 갈등의 분화구가 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급변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남북한은 아직도 냉전시대의 유산을 그대로 안고 오늘을 살고 있다.
2, 보편교회의 입장: 사회교리에 나타난 가톨릭 세계관
그렇다면 오늘의 변화하는 세계질서를 보는 보편교회의 눈은 어떠한가. 교황 레오 13세가 1891년 노동헌장으로 불리는「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반포한 이래 그리고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세상과 더불어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였던 우리 교회는 인류의 공동선을 위하여 그 동안 끊임없는 관심을 피력해왔다. 역대 교황들의 많은 교서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여러 문헌들 각국 주교단의 성명서 그리고 국제적 차원이나 지역 교회의 차원에서 교황청의 주도하에 있는 여러 기구들의 활동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보편교회는 무엇보다 교회의 세계의 상호관계를 크게 강조하며 지상교회와 천상국가의 융합을 밝히고 있다. 지상에 현존하는 교회는『「볼 수 있는 단체요 영적 공동체로서」전 인류와 함께 길을 걸으며 세계와 같은 운명을 겪고 있다.』(사목헌장 20항) 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기본적 입장이다.
교회의 가르침 속에는 평화의 본질에 관한 언급이 매우 잦다. 그렇다면 교회가 추구하는 평화는 무엇인가. 한마디로「평화는 정의의 열매」(사목헌장 78항)이라는 것이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 없는 상태나 적대세력간의 균형유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실현해야 할 그 질서의 현실화가 바로 평화라는 것이다. 이토록 교회의 평화관은 매우 적극적이며 진보적이다.
특히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어머니요 스승」, 「지상의 평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사목헌장」, 바오로 6세의「민족들의 발전」, 요한 바오로 2세의「사회적 관심」등은 세계적 공동선과 사회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피력하였다. 이들 문헌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정신은 인간에 대한 존경, 만인의 본질적 평등과 사회정의 민족들의 형제성, 자유주의의 극복,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 개인의 인간전체와 전 인류의 발전 등이다. 대체로 보아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이 과거에는 계급문제에 치중하였는데 근래로 오면서 세계문제로 그 강조점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제 세계적인 불평등과 불의에 관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더 많이 피력되고 있다.
교회는 특히 인류의 발전과 연관하여 전인적 발전과 전 인류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발전은「다만 경제적 이유에서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인간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야」(백주년 29항)하며「인간에게 봉사하는 경제발전」(사목헌장 64항)이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인류전체의 공동발전」(민족들의 발전 11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발전」은「평화」의 새 이름이다」(민족들의 발전 76장)이라고 천명함으로써 교회가 추구하는 공동선, 정의, 평화, 그리고 발전이 같은 뿌리를 갖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아울러 사회교리는 자본주의체제와 연관하여「시장 메커니즘에 의하여 충족될 수 없는 공동의 그리고 질적인 욕구들」(백주년 40항)이 있음을 밝히고 시장과 기업이 공동선을 추구해야 할 것을 거듭 촉구하고 있다. 최근에 들어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점차 자연과 인간의 환경 그리고 생명(교황 새 회칙「생명의 복음」)의 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보편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경쟁과 경제논리를 앞세우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과는 거리가 무척 멀다. 교회는 인간의 전인적 발전과 협력을 통한 인류의 공존공영을 추구하며 이 뜻이 지역교회의 구체적 활동 속에서 실현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 세계 속에 한국교회: 그 역할과 과제
한국교회는 이제 해방 50년을 맞고 있다. 해방 50년은 또한 분단 50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성향과 활동역점은 무엇인가.
최근 세계화는 김영삼 정부의 최우선 국가정책목표이자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거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의 담론을 지배하고 있다. 대체로 세계화는 경쟁과 경제논리로 정리되고 아예 생존문제로 첨예하게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문민운은 상대적으로 빛을 잃고 사회복지, 삶의 질, 공동체 등의 공동선 가치는 뒷전으로 크게 밀리고 있다. 최근 정부는「삶의 질의 세계화」를 주창하고 나섰으나 이를 뒷받침할 정치적 의지도 예산도 프로그램도 갖추고 있지 않아 정치적 상징조작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북한「핵」문제에 묶이어 민족화해 및 통일을 향한 길목도 거의 막혀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교회는 보편교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전인격적」 그리고「전 인류적」관점의 세계화를 통하여 정의로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아울러 분단된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여 민족 공동체 형성을 도모하는데 큰 몫을 해야 할 시대적 소명과 사명을 안고 있다. 그것이 세계질서의 변화 속에서 우리가 미래를 보다 멀게 그리고 바르게 투시하고 참된 의미의 정의, 평화, 그리고 발전을 도모하는 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그 동안 우리 교회는 1984년 창건 200주년을 맞아 교황방한과 103위 시성식을 거행하는 기쁨을 맛보았고 1989년 세계성체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한국교회의 성장된 모습을 세계에 과시했다. 그런가 하면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FABC), 아시아 평신도회의,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지도자협의회 등을 통하여 지역지도자협의제적 협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왔다.
무엇보다 군부 권위주의의 어두운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정의평화의 구현을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 빛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사회복지, 환경운동 등 사회운동을 통하여 그리고 교육, 언론, 출판 등의 문화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고 보다 인간화된 사회를 건설하는데 큰 몫을 해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이 때로는 조직화, 내실화되지 못하였거나 신자들의 무관심 속에 기대했던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이제 변화하는 세계와 한국 속에서 교회의 새로운 시대적 소명을 바르게 인식하고 그 뜻을 실현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서울대교구에서 사회사목부와 민족화해위원회를 새로 세운 것은 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큰 뜻이 있다고 본다. 주교회의 산하에 해외 원조 전담기구를 별도로 설치한다는 소식도 매우 고무적이다.
특히 사회복지와 민족화해는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 교회가 역점을 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세계화의 격류 속에서 국민국가의 사회경제적 초점이 날로 악화되는 오늘의 시점에서 그릇된 발전의 역기능을 줄이기 위한 교회의 사회봉사는 우리 사회의 인간화를 위해 교회가 가장 큰 관점을 두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범교회 차원의 관심과 운동의 조직화 및 인적 자원개발을 위한 효율적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아직도 분단의 어두운 그림자를 극복하고 민족화해의 술통을 터는데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본다. 특히 이번에 사제 4명이 곧 방북하게 되고 어쩌면 김수환 추기경이 북한을 방문하게 되리라는 소식은「오십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라는 레위기의 말씀을 되새기게 하는 감동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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