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한 지 몇 년 되지 않는 어떤 지식인 한 분이 평협 상임위원이 되어 본당의 여러 행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이분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신부님, 성당에 다니면 편하게 축복이나 받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여러 사람과 부딪혀 가며 일을 해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종교관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우리 인간이 드리는 전인격적 응답」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신앙 관이 몸에 배인 신자들이 얼마나 될는지를 생각하면 조금은 맘이 어두워진다. 이런 맘을 가지고서 하느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자신의 온 생활로써 충실히 응답하려고 끊임없이 안간 힘을 써 봐도 실수하고 죄짓는 허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인데 아예 신앙관 자체가「축복 받는 종교심」에 머물러 있을 때 그의 소위 신앙생활은 또 다른 형태의 이기심 추구일 뿐이고 그런 신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교회란 것은 신앙의 가면을 쓴 이기주의자들의 냄새 나는 집단일 뿐이다. 다행히 위에서 말한 교우는 지금 참 좋은 신앙인이 되어가고 있다.
하느님이 사람을 부르시고 사람이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그분의 계시(啓示)를 통해 시작된다. 계시란 것은 신적(神的)사실에 대한 인간 측의 지적(知的)호기심을 채워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과 당신의 인간사랑에 대해 계시를 하시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 측의 응답을 요구하는 부르심이요 초대이다. 즉 계시는 항상 인간의 소명과 삶의 방향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들을 학문적으로 정리하여 사람들에게 제시해 주는 것이 윤리신학의 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하느님과 자신의 전인격적 만남은 위의 신앙관 정의에서 이미 표현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계시 하셨고 그분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에로 부르셨다. 따라서 그리스도 그분은 계시의 정점이요 계시 그 자체이시다. 이렇게 볼 때 계시가 하느님의 부르심, 초대요 인간의 소명과 삶의 방향이라면 그리스도 그분의 인격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초대, 우리 삶의 방향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삶의 모델이요 기초이며 절대적 기준이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 저만큼 떨어져서 앞서가시며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시는 우리 삶의 모범만으로 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니다. 그분과 우리는 공동의 생명(common life)을 나누고 있다. 즉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초자연적 생명을 나누어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되어 새 인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인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살아야 한다기보다 「그리스도와의 공동생명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정의 1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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