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어른들의 세계를 모릅니다. 부모가 얼마나 자기들을 사랑하고 또 세상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들며 그리고 부부간의 애정이나 사업에서 오는 여러가지 애환 들은 자녀들은 모릅니다. 부모는 그냥 자기들을 키워주는 분이 달라면 주는 분이고 필요하면 찾는 분이지 부모가 과연 어떤 삶을 사는 분인지 잘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의 두뇌를 통하여 하느님의 속성을 파헤쳐 보고 그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자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성서에 등장하는 몇가지 안되는 말씀들을 통하여 어렴풋이 짐작이나 하고 추측이나 할 뿐입니다. 사실 우리가 모두 알 수 있다면 그분은 더이상 하느님이 아닙니다.
오늘은 삼위일체대축일입니다. 각 사람에겐 「인격」이라는 것이 있듯이 하느님께도 위격이 라는 것이 있습니다. 위격이 하나면 한분이십니다. 그런데 위격이 셋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세분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성서는 그 세 위격이 오직 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삼위일체대목에서 고개가 자꾸 갸우뚱해집니다.
위격이 셋이면서도 한분이시고 한분이시면서도 위격이 셋이 되십니다. 신학자들은 그래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설명을 시도하지만 그러나 세상 끝날까지 이 시도는 제자리 걸음에 그칠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에서 그분은 직접 뵙기 전에는 우리는 사실 확실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성서 말씀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잠언 8, 22~31)에서는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의 내용이 아스라이 비쳐주고 있습니다. 즉 「지혜」라는 위격화된 존재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작업을 하시고 특히 사람들이 있는 곳에 기쁘게 있으면서 어떤 목적의 일을 하십니다. 이 지혜가 도대체 누구냐?
이 지혜는 하느님의 속성과 관계를 맺는 중개자로서 등장되는 분인데 이를테면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로 나오며 그리고 그 분은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십니다. 그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오늘 1독서에서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희미하게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2독서 로마 (5, 1~5)와 복음에서는 성령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시어 믿음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 그리고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하신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앞으로 다가 올 일을 일러주시는 분, 그 분이 성령이십니 다. 즉 예수님께서 다하지 못하신 말씀을 성령께서 계속 전달해 주시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 안에서도 그 역할이 분담되어 있는 듯이 보여집니다. 하느님이 라는 관계는 없지만 아버지가 계시고 아들이 계시며 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그 관계를 가능케하고 또한 아버지와 아들에게 근본적인 힘이 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 세 역할이 고유하면서도 그러나 하느님은 한분이십니다.
성부인 아버지께서 창조사업을 주도하셨다면 지혜이신 말씀께서는 구속사업을 수행하셨고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발하시는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일을 가능케 할 뿐만아니라 성자가 이룩한 구원사업을 마무리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역할을 억지로 불인다면 그렇지만 또 가만히 들여다보면 창조고 구속이고 모든 작업은 세 위격이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말표현이 이상하지만 하느님이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시다 해서 한 위격씩 따로따로 분해 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또한 조립되어진 것도 아닙니다. 한 위격을 빼면 다른 위 격도 존재가 되지 않은 그런 공전과 공유와 공생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 집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자체가 놀라운 신비입니다.
이 지구는 땅덩어리와 물과 공기가 있습니다. 마치 삼위일체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라도 떼어버린다면 생물체는 존재되지 않습니다. 지구는 하나의 신비이듯이 우주도 신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도 들여다보면 「신비」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작은 미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신비는 어떻겠습니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원인과 결과는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인간 이 감리 그분의 사랑에 초대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그리 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때 그분의 신비를 깊이 이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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