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50년동안 한국천주교회는 반쪽만의 교회로 살아왔다. 남북 분단의 비극은 민족사회뿐아니라 그 안에 있는 교회도 둘로 갈라 놓았다. 분단의 역사는 북한교회를 「목자 없는 침목의 교회」로 돌변시켰고 지금 그 형체마저 소멸되고 있다. 금년 6월 10일자로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된지 20주년을 맞은 김수환 추기경이 한번도 지난 20년동안 자신의 사목지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아픔을 신자들은 상기해야 할 것이다. 분단 50주년을 맞은 지금, 반세기에 걸친 상호 불신의 깊은 수렁을 메우고, 동족상잔의 민족적 상처를 감싸며 진정한 화해와 일치, 그리고 통일을 이룩하는 신뢰와 축복이 그 어느때 보다 절실한 때이다. 남북의 신앙 공통체가 하나 되는 그날을 염원하고, 북한 교회의 실상을 바로 알기 위해 해방전후의 북한 교회 현황을 소개한다.
▩해방이전 북한교회의 실상과 교세
해방 직전인 1943~1944년 한국 천주교회 신자 총수는 17만9천1백14명이었다. 이중 남한교회 신자수가 12만2천1백6명으로 전체 신자 총수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북한 교회 신자수는 5만7천8명이었다.
교세 통계에서도 볼 수 있듯 해방전 북한 지역은 남한 지역에 비해 신자 규모가 작았다. 또한 선교 여건을 결정짓는 모든 분야에서 북한은 남한에 비해 열세에 있었다. 그 이유로는 천주교 전래 과정에서부터 선교가 서울과 경기도를 기점으로 남한 지역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북부지방의 정치적, 경제적 이유와 지리적 한계를 들 수 있다.
먼저 천주교 수용과정의 주체가 됐던 실학자들과 조선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가 한양을 중심으로 경기도에 집중돼 있었으며 산이 많고, 험하며 토질이 척박해 인구가 적었던 지리적 조건이 북쪽 지방을 남부 지방에 비해 20년이상 선교가 늦어지게 했다.
이러한 선교 환경의 제약적 조건들은 일제시대에 들면서 개신교가 북한지역에서 벌인 활발한 선교활동에 밀려 천주교가 선교 경쟁에서 뒤처지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 결과 조선대목구에서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가 분리 독립(1911년 4월 8일)한지 9년이 지나서야 북한에 처음으로 원산대목구(1920년 8월 5일)가 서울대교구에서 독립됐고, 평양대목구는 1927년 3월 17일 지목구 설정이후 1939년 7월 11일에 가서야 교계제도로서 면모를 갖춘다.
북한교회를 지리적으로 구분하면 서울대교구 관할지인 황해도 지역 대부분과 평양, 함흥교구, 덕원면속구, 38도선 이북에 있는 춘천교구 일부가 여기에 속한다.
북한 천주교회가 교계제도로서 공식 출범한 것은 1920년 8월 5일 서울대목구에서 원산대목구가 분리 독립하여 함경남북도를 관할하면서부터이다.
독일의 베네딕도 수도회가 관할권을 위임받고 사목할 당시 원산대목구 신자수는 함경도 인구 1백80만명중 5백명에 불과 했고, 본당도 원산과 남평 2곳뿐이었다.
원산대목구는 이후 8년동안 신자를 1만6천5백명으로 끌어올렸고, 1928년에는 연길과 의란에 지목구를 분할시키는 눈부신 성장을 보였다. 원산대목구는 1940년 함흥대목구로 개칭되면서 덕원면속구를 독립시켰다.
원산대목구 설정에서 함흥교구로 발전하기까지 20년동안 함경도지역 교회는 신자수가 3만3천4백52명(덕원, 연길, 함흥 포함-1944년 교세)으로 대목구 설정당시 보다 약 6.7배 증가하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1939년 7월 11일 설정된 평양대목구는 1927년 3월 17일 서울대목구로부터 지목구로 분리되면서 교계를 이루었다. 평양지목구가 설정되기 이전 1923년 평안도 지역 천주교와 개신교의 교세 현황을 비교하면 평안남북도 총인구 2백44만1천4백명중 개신교 신자가 4만1천5백명, 천주교 신자는 4천8백명으로 약 8.6배의 교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메리놀외방전교회가 평양지목구를 사목하면서 1936년에는 본당 19개소, 공소1백34개, 교구 신자총수 1만7천7백38명, 예비신자 3천2백여명을 확보하는 성장을 보였으며, 1944년도에는 신자수가 2만8천4백명으로 지목구 설정 당시보다 신자수가 약 5. 9배가 증가했다.
한편 1943~1944년 북한교회 교세 통계표를 보면 평양, 함흥(덕원면속구 포함), 연길대목구에 감목 주교가 각 1명씩, 독일인 신부가 53명(함흥11, 덕원20, 연길22), 내국인 신부 26명(평양14, 함흥5, 덕원2, 연길5), 외국인 수사 43명(덕원25, 함흥1, 연길17), 내국인 수사 13명(덕원12, 연길1), 외국인 수녀 37명(연길13, 함흥6, 연길18), 내국인 수녀 86명?평양 31, 덕원 23, 함흥 13, 연길 18?, 총 5만7천8명의 신자가 북한교회에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북한교회가 한국천주교회에 끼친 영향
북한교회가 한국천주교회와 지역 사회에 영향을 미친 점을 하나만 들라면 당연히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사업을 손꼽을 수 있다.
평양교구 제5대 교구장이며 노기남 대주교에 이어 한국인으로 두번째 주교로 서품된 홍용호 주교는 「가톨릭 연구」지 1934년 2월호에 「먼저 문맹을 퇴치하자」 는 기고를 싣고 「가톨릭 운동은 오로지 가톨릭 진리를 민중화함에 있다」면서 「각 교회와 집합에서 문맹퇴치 기관을 설립,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모르는이면 다 가서 배워야 되고 아는 이면 가르쳐야 된다」고 문맹퇴치운동에 불을 질렀다.
외국인 선교사뿐 아니라 한국인 성직자를 필두로 평신도 유지들이 문맹퇴치운동에 동참하면서 평양에서는 1906년 청년회를 조직, 기명학교를 설립하였고, 진남포에서는 안중근이 삼흥학교와 숙의학교를, 고산에서는 박준호가 측량학교를 설립했다.
원산교구의 경우 1921년5월 원산 본당에 부임한 옥 엑카르트 신부가 야간 강습소를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6년제 해성 보통학교가 설립됐고, 1927년 4월 1일부터는 「해성유치원」을 설립 원아를 모집, 문맹 퇴치운동에 힘썼다.
이후 일제의 문화 정책으로 1940년대에 들면서 교회가 세운학교가 페쇄되면서 60여개가 넘었던 학교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1944년에는 평양교구에 초등학교와 학원이 3개소, 함흥교구에 5개소, 덕원에 5개소, 연길에 6개소 등 총 19개 소학교만이 남았다.
평양과 원산에 메리놀수녀회와 성베네딕도수녀회가 각각 진출하면서 곧바로 시작한 사업은 빈민 시약소와 병원 운영이었다. 성베네딕도수녀회의 자료에 따르면 1928년 원산에 있는 「마리아의 도움」시약소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가 무려 4천7백명에 달했고, 그중 4백명이 교리를 배우게 됐다고 한다. 또한 1929년 한해동안 시약소를 통해 영세받은 이가 1백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한편, 시약소와 병원을 선교와 사회운동의 발판으로 삼은 교회는 1944년 북한 전역에서 병원 6개소, 시약소 6개소를 운영했다.
북한교회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영성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인 최초의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를 창설했다는 점이다.
1932년 6월 27일 당시 평양교구장이던 모리스 몬시뇰에 의해 평양 상수리구에 창설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1938년 3월에 교황청으로부터 설립인가와 회칙을 인준받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41년 12월 제2차 세계대전이 악화됨에 따라 장정온 수녀가 초대 원장수녀로 임명되면서 메리놀수녀회와 완전히 분리 독립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라는 창립 정신과 복음선교를 위해 직접 선교를 우선으로 하는 수도생활을 전개했다.
1940년 6월 27일 수녀원 최초의 서원식으로 11명의 한국인 수녀를 탄생시킨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평양교구에서 학교, 본당, 자선사업 등을 맡아 선교활동에 힘썼다.
▩해방이후의 북한교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평양대목구는 1940년대 초에 메리놀회 소속 미국인 신부와 수도자들은 적국 시민으로 일본에 의해 추방당한 공백을 평양교구 제5대 교구장인 홍용호 주교를 위시한 한국인 신부와 수녀들이 메웠다.
반면 연길, 함흥대목구의 경우는 독일 출신이란 이유로 일제말엽까지 유일하게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했던 독일 분도회 신부와 수사들은 공산화로 인해 가장 먼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광복과 함께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적성국 시민이라는 이유로 1945년 9월 2일 연길대목구의 젤러 수사를 총살하고, 1946년 5월에는 브레헤르 백주교를 비롯한 독일인 신부 19명과 수사 17명, 수녀 2명, 이태리인 수녀 1명을 체포, 연길, 삼도구, 무산 등 세곳에 감금했다.
공산당은 무자비한 종교탄압정책을 펼치면서 그 첫 시도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1946년 3월 북한 정권에 의해 단행된 토지개혁으로 덕원 분도 수도원은 건물과 대지를 제외한 모든 토지를 몰수 당해, 수사들은 생계마져 위협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평양대목구의 경우 1947년 중반까지는 북한 당국과 별다른 마찰없이 상당한 교세 증가를 기록했다. 1946년 초에는 일제가 몰수했던 관후리 주교좌성당을 되찾아 대성당 신축공사를 대대적으로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3월이후 급격히 강화되기 시작한 「반간첩 투쟁」을 계기로 성직자와 수도자 대부분이 일시에 체포됐다. 북한 당국이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이 명확해지자 평양의 교회들을 「남한과 비밀연락을 하는 근거지」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이후 공산당은 1948년 여름 홍용호 주교의 불법 납치를 시작으로 「특별정치범」으로 모든 신부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성직자들에 대한 검거선풍은 1949년 5월 절정에 달해 한국전쟁발발 직전까지 계속됐다. 이무렵 공산정권에 의해 원산, 고산, 고원, 영흥, 흥남, 함흥 등지에서 체포된 신부, 수사, 수녀는 약 67명이나 됐다.
성직자의 체포와 함께 북한교회의 모든 재산은 몰수 전용됐다. 북한지역의 유일한 신학교였던 덕원산학교와 덕원수도원이 폐쇄됐을뿐 아니라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원도 몰수돼 수녀들이 강제로 영유분원에 옮겨졌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 이르러 북한 지역에는 단 한곳의 교회도 남아 있지 않게 됐다.
한편 북한 당국의 박해를 피해 해방후 한국전쟁기까지 월남한 신부들은 평양대목구 2명, 함흥덕원 연길 소속 7명, 황해도지역 5명 등 모두 14명뿐이었고 체포되거나 남북된 성직자들 제외하면 북한지역에는 단 한명의 성직자도 존재하지 않게 됐다.
이처럼 북한교회 신자들은 1949년에서 시작하여 불과 1년만에 주교와 신부를 모두 잃었으며, 덕원 수도원을 필두로 원산, 고원 등지에서 체포된 외국인 신부, 수사, 수녀들은 4년이란 긴 세월의 강제수용소생활과 「죽음의 행진」으로 25명이 병으로 죽거나 옥사했다.
또한 북선위가 간행한 한국 천주교 통일사목 자료집에 따르면 해방이후 한국전쟁 종전까지 공산군에 의해 피살된 한국인 성직자 수도자는 모두 17명에 달하고 감옥에서 병사한 이들도 3명이나 된다. 또 피납된 한국인 성직자 수도자는 25명이고 행불자도 17명이나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전쟁이후 북한교회
전쟁이 끝난 이후 북한 주민들의 반그리스도교적 감정과 1950년대말부터 본격화된 북한 당국의 반종교선전정책의 여파로 상당수의 평신도들이 신앙을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1950년판 「조선중앙년감」에 처음으로 종교현황을 밝힌후 1988년 이전까지 북한이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종교통계를 발표한 바가 없었다는 것이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나 북한 공산당은 1972년에 만든 신헌법에 「종교자유」조항에다 구헌법에 없던 「반종교선전의 자유」란 구절을 삽입했다. 이는 북한에서 아직 종교가 완전히 말살되지 않았다는 단적인 증거이며 종교적 잔재마저도 소멸시키고야 말겠다는 공산당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 당국과 최근 문체부가 발간한 「북한지역 종교 자료집」은 지금까지 신앙을 지켜오고 있는 신자들이 대략 1만여명정도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1972년 7월 4일「남북조절위원회」설치이후 국제 정세의 변화와 남북관계의 개선으로 1989년 6월에 결성된 「조선 천주교인 협회」(위원장=장재철)의 최근 보고에 따르면 현재 덕원, 원산, 남포, 황남, 평남 등에 4개 지구를 조직하고 있으며 95년 현재 3천5명의 신자가 조선 천주교인 협회에 등록돼 있다고 발표했다.
한편, 한국천주교회는 1983년 한국 천주교회 2백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의 전신인 북한 선교부를 발족, 지금까지 북한 선교를 위한 다방면의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 김수환 추기경이 1975년 6월 10일자로 평양교구장 서리직에 임명되면서 서울대교구장직과 겸직하고 있으며, 덕원 면속구와 함흥교구의 책임자로 이동호 아빠스가 임명되어 있으나 북한에는 아직까지 한명의 성직자나 수도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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