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50주년에 맞는 6.25는 사뭇 다른 감회를 안겨준다. 그래서 금주 성지순례는 한국동란 당시 교회를 지키고 월남하는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피난가지 않고 격전지에 남아 있다 공산군에 체포돼 무참히 살해된 성직자들의 묘역을 참배하기로 하자.
이름만큼 평안한 호반의 도시 춘천, 하지만 이곳 춘천에는 아직까지 아물지 않은「분단」이라는 민족의 상처를 안고 잠들어 있는 6.25순교자들의 묘역이 있다.
도심 한가운데 우뚝 솟은 언덕에 자리잡은 춘천교구 주교좌 성당인 죽림동 성당, 춘천 시내를 사방으로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 성직자 묘지에는 6.25때 숱한 고초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다섯 분의 성직자들의 묘소가 깨끗하게 단장돼 있다.
한국인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와 백응만 다마소 신부, 그리고 아일랜드 출신 성골롬반 외방전교회 소속 구도마(Thomas Quinlan) 주교와 라바드리시오(Patricius Reilly) 신부, 고안토니오(Antonius Collier) 신부, 진야고버(Jagobus Maginn) 신부가 이 묘역의 주인공들이다. 이중 이광재 신부와 백응만 신부의 묘소는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채 가묘로 남아 있어 참배객들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다.
춘천은 가까우면서도 먼 거리에 있는 전원(田園)도시이다. 나들이를 즐기는 행락객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들러본 도시이면서도 마음먹기가 힘든 곳이 춘천이다. 서울에서 두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지만 주말이면 경춘가도를 가득메운 차 때문에 좀처럼 발길이 내키지 않는 곳이 춘천이다. 따라서 이번 주림동성당 성직자 묘소 주말 순례길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편한하고도 경건함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스런 마음으로 떠나보자.
보다 빠른시간에 춘천에 가기를 원하면 자주 있는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서울 상봉동이나 구의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춘천행 버스를 타면 청평, 가평을 거쳐 거의 예정된 시간에 춘천에 다다를 수 있다. 또 서울 청량리역에서 경춘선 열차를 이용하면 온가족이 열차 여행의 상큼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춘천 죽림동성당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약 10분 거리에 있다. 따라서 주말에는 택시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므로 도보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열차를 이용한 순례객들은 택시를 타는 것이 편하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중앙로 방향으로 곧장 직진해 약 15km를 걸으면 오른편에 시장을 낀 축협매장이 나오고 왼편에 중앙로 파출소가 있는 작은 사거리가 나타난다. 오른편 시장 큰 소방도로로 약 2백미터를 걸으면 언덕배기에 아담한 죽림동 성당이 보인다.
올해로 설립 75주년을 맞는 죽림동성당은 춘천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6.25때 파괴됐다가 미군과 신자들의 도움으로 재건축, 1957년에 다시 축성한 성당이다. 따라서 죽림동성당도 성직자 묘소에 잠들어 있는 6.25순교자들과 같이 한국 동란의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죽림동성당 뒷편에 있는 성직자 묘역에는 이미 밝혔듯이 6.25와 관련한 다섯분의 성직자들의 묘소가 단장돼 있다. 이중 춘천교구 초대교구장이던 구도마 주교는 한국전쟁때 직접 순교하진 않았지만 공산군에 체포, 「죽음의 행진」을 겪으면서 3년간 감금생활을 당했다.
구주교는 6.25발발후 일주일이 되는 7월 2일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던중 공포를 쏘며 들이닥친 공산군에 체포돼 카바난 신부와 함께 구금됐다. 구주교는 이후 카바난 신부와 골롬반 수녀들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하며 북한으로 암송됐으며 도중 카바난 신부는 1905년 12월 6일 페렴으로 선종, 압록강변에 묻혔다. 구주교는 1953년 4월에 석방되기 까지 34개월간 14개 수용소를 전전하는 모진 억류생활을 거치면서도 흐트러짐없는 인품으로 신앙인의 귀감이 됐다.
주재용 신부가 집필한「태백의 인물」중 구이란 주교의 남북생활 증언을 보면 구주교를「수용소의 자원(自願)머슴」으로 묘사하고 있을 정도다. 주신부는 목격자의 증언을 그대로 서술하면서『영하40도의 혹한이었건만 구주교님께서는 매번 묘지를 파기 위해 앞장서서 가시는 것이었다. 얼어붙은 땅을 파고 감시병들은 빨리 돌아오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건만 언제나 새로 지은 무덤에 마지막 손질과 망자의 명복을 비는 절차를 다하지 않고는 돌아오시는 일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주교는 한국전쟁이 끝난후 석방돼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1954년 교황사절 대표로 재입국, 1955년 10월 3일 춘천교구가 지목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돼면서 교구장 주교로 서품됐다. 춘천 소양로본당 초대 주임신부였던 고안토니오신부는 1938년 서품을 받고 성골롬반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 횡성본당 보좌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1949년 1월 소양로 본당 주임을 맡으면서 사목활동을 한 고안토니오 신부는 1950년 6월 27일 인민군에 체포돼 사살당했다.
고신부는 전쟁이 발발하자 구도마 주교를 찾아가 인민군의 시내 진입을 알리고 자신은 신자와 부상자를 돌보겠다고 보고했다. 구주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당 가까운 곳에서 부상자를 치료하는 일을 하다가 공산군에 체포된 것이다. 고신부와 함께 체포됐던 김가브리엘의 증언에 따르면 고신부는 복사인 감가브리엘과 함께 체포돼 밧줄에 묶여 끌려 가다가 한 공산군이 경고도 하지 않고 총질을 해대 그자리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가브리엘은 고신부가 총탄에 맞으면서도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쓰러져 목과 어깨에 총상을 입고 살아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춘천교구 소속 백응만(다마소) 신부는 1945년 8.15해방후 그해 11월에 사제서품을 받고 북한 땅 평강본당과 이천본당 주임신부로 겸임 발령을 받고 사목활동을 해오다 공산군에 체포 투옥된후, 평양감옥으로 이송, 모진고문에 이기지 못하고 옥사를 했다.
강원도 풍수원본당 보좌신부로 있다가 양양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아 사목활동을 하던중 6.25를 만난 이광재 신부는 그동안 월남하는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 평신도들의 편의를 돌보아주다 9.28수복으로 퇴각하던 공산군에게 체포, 원산으로 암송된후 총살당했다.
한편 춘천교구민들은 폭격으로 파괴된 죽림동 성당을 재건하는 공사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1951년 10월 11일에 한국전쟁으로 순교한 고안토니오 신부 등 세분의 골롬반선교사들의 장례미사를 봉헌하고 성직자 묘역을 먼저 단장한 후에 성전 재건축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들 성직자들의 기일을 찾아 묘지를 방문하는 이들도 몇안되고 지나간 역사의 자취만큼이나 신자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이들의 순교자적 정신과 숭고한 신앙혼은 매년 찾아오는 6월 25일이면 어김없이 부활하고 있다.
분단 50주년과 한국동란 45주년을 맞아 공산군의 총칼앞에 육신은 쓰러졌지만 그 신앙혼만은 영원히 살아있는 순교의 땅, 춘천 죽림동성당 성직자 묘역을 순례의 성지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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