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오늘날 세계화라는 단어는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행되고 있는 단어이다. 모든 국제회의의 주제도 이 단어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지난 수십년동안 리우 환경회의, 카이로 인구 회의, 최근 코펜하겐에서의 사회개발회의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세계 경제질서의 재편을 의미한다. WTO 출범은 이와같은 세계화의 경제적 현실이 구체화 되고 있는 뚜렷한 예이다. 이 새로운 경제질서는 경쟁을 필연적 요소로 인정하는 질서이다. 국가와 민족의 테두리를 허무는 이 새질서는 경쟁력이 강한 선진국에서는 부익부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경쟁력이 약한 가난한 나라에서는 빈익빈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로인하여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는 그 어느때보다도 첨예한 갈등을 불러올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새로운 도전을 제기하는데 이는 한마디로 차원높은 국제협력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새로운 국제협력의 틀이 만들어져 이를 통하여 무한경쟁의 세계질서 속에서 새로운 인류 공동체의 가치 실현이 이루어져야 하겠다는 당위성을 의미하고 있다. 인간문제의 전문가인 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예감하고 대응방안을 제시하여 왔는데 이들은 흔히 「감추어진 보화」라 불리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으로 제시되고 있다. 국제협력의 차원에서 한국교회는 어떤 위치에 처해왔으며 앞으로 국제협력의 방안은 어떠하여야 하는가?
이를 위하여 교회가 제시하고 있는 국제협력의 관점은 어떠하며 국제협력을 위한 제도적 틀은 무엇이며 한국교회의 국제협력의 과거와 현재의 위상은 무엇이며 바람직한 국제협력의 방안은 무엇인지를 살피고자 한다.
국제협력의 교회 관점
국제협력에 관한 교회적 관점은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속에 제시되어 있다. 이는 역대 교황들의 사회적 가르침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특별히 「어머니와 교사」(1961) 「지상의 평화」(1963) 「사목헌장」(1965) 「민족들의 발전」 (1967) 「사회적 관심」(1987) 「1백주년」(1991)등의 문헌은 국제협력에 관한 교회적 관점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문헌들이다. 이들 문헌은 인류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하여, 나아가서 인류평화와 일치를 위하여 애덕과 정의에 기초한 나눔과 연대의 방안으로써 실천적인 국가간의 원조를 국제협력의 중요한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원조를 대응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국가와 민족간의 불균형적인 부의 편재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국제협력에 있어서 정치적인 갈등, 문화적인 차이,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관한 불균형적인 사태에 관하여서도 여러가지 제안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보다도 부유한 국가나 민족과 가난한 국가나 민족간의 경제적 갈등이 세계문제의 근저에 있다는 이해에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원조는 이 불균형적인 사태에 관하여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인 행동방안이라는 현실적인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2천년 동안 끊임없이 설파하여 온 이웃사랑 실천을 세계적인 차원에서 적용한 원칙이라고 해석된다.
국제협력 실천방안
선진국교회는 일찍이 이러한 가르침에 바탕을 둔 교회원조기구들을 설치하기 시작하는데 미국의 「가톨릭구제회」가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전문적 원조기구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2차대전 후 구라파의 전후 복구와 빈곤에 대한 원조를 시작한 미국의 가톨릭 구제회는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해외원조기구이다. 이어서 독일의 「미세레올」이 해외원조기구로 탄생되고 공의회 이후, 특히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 자극받은 선진국교회는 다투어 원조기구를 설치한다. 오늘날 선진국 교회원조기구들은 자체협의체를 갖게 되는데 이를 CIDSE라고 부른다. 이들 원조기구들은 제3세계의 발전을 위한 개발원조기구들로 선진국내의 사회복지사업을 총괄하는 「까리따스」와 구별된다. 1백년 에 가까운 전통을 지닌 까리따스는 이와같은 전문적인 해외원조기구 설치에 자극을 받아 해외원조를 시작하게 되는데 지원분야는 주로 긴급구호적 원조이다. 이들 까리따스는 로마 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까리따스 조직을 통하여 전세계 1백55개국 까리따스를 통한 지원을 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는 아시아 각국 까리따스와 선진국 교회원조기구가 공동 설립한 APHD라는 기구가 아시아 각국의 개발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1933년부터 본격적인 해외원조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수혜자로서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1980년대 말까지 해외원조를 통한 국제협력의 수혜자였다. 1950년대의 한국 전쟁 이후 선진국교회 특히 미국교회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아왔는데 전후에는 주로 긴급구호적인 원조를 받았고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반까지는 복지ㆍ개발사업의 원조를,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산업화과정의 희생자들인 농민, 노동자, 도시빈민의 사회운동에 많은 지원을 받았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선진국교회로부터 받은 원조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불가능한데 이는 원조에 관한 모든 기록과 자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에는 주교회의 인성회가 파악한 자료의 일부가 남아있는데 1970년대 10년동안 선진국교회 원조기구협의체(CIDSE)가 보관한 자료에 의하면 총7백28개 사업에 미화 2천3백만 달러로 매년 평균 70여개 사업에 2백30만달러의 원조가 이루어졌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것을 포함한다면 그 액수는 천문학적인 숫자에 달하리라고 추산된다. 특히 미국 가톨릭구제회가 한국전쟁 직후부터 1974년까지 막대한 식량과 물자를 한국교회에 지원한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이들 원조는 전쟁후 긴급구호의 단계를 거쳐 복지사업, 개발사업, 사회운동의 단계를 거치면서 오늘날 한국교 회의 사회사목활동의 초석을 다지는 밑거름이 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국제협력의 차원에서 선진국교회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은 수혜자였다고 볼 수 있다.
공여자로서 한국교회
1980년대말까지 한국교회는 국제협력의 수혜자였지만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주교회의 산하의 인성회(현 사회복지회)를 통하여 소규모적이고도 간헐적으로 해외원조를 해왔다. 즉 1984년 에디오피아 대기근시 당시로서는 거액인 1억3천여만원을 지원했고 그 이후 멕시코 지진, 콜롬비아 화산폭발, 필리핀 지진, 방글라데시 대홍수, 걸프전 이후 이라크, 미국 LA 폭동 한국 교포지원 등으로 약 6억원을 지원했다.
한국교회가 체계적인 해외원조를 시작한 것은 1989년 세계성체대회시 설치된 한마음한몸운동이다.
비록 서울대교구가 주관하긴 하였어도 원조기금의 적립, 상설모금, 원조정책과 심의지침, 심의결정기구와 원조업무의 설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운동은 국내원조와 해외원조를 겸하고 있으며 해외원조도 사회적 사업뿐 아니라 사목적 지원을 하고 있는 점에서 특이하다. 한마음 한몸운동이 1989년부터 시작한 해외원조는 1990년 5개사업 11만4천달러, 91년에는 6개사업 14만4천불, 92년 6개사업 14만4천불, 93년 23개사업 27만4천불, 94년 13개 사업 23만 7천불, 금년 상반기에 14개사업 45만 8천불을 지원하여 지금까지 68개사업 총액 1백38만3천불을 지원하였다.
본격적이고도 공식적인 한국교회 전체의 해외원조는 1992년 가을 주교회의 총회의 결정에 따라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가 시작한 해외원조이다. 사회복지위원회는 인성회의 전통을 이어받았는데 인성회의 해외원조 수혜의 창구로서의 전문적 이론과 경험을 계승하여 해외원조 공여자로서의 창구역할을 맡게 되었다. 사회복지위원회의 해외원조는 헌금자인 신자의식에 맞게 긴급구호 지원으로 시작되었는데 시기적으로는 소말리아와 르완다내전 참상이 알려지면서 원조에 활기를 띨수 있었다. 또한 긴급구호는 사회복지위원회가 소속한 로마 국제까리따스의 전문성과 전세계적인 원조체계를 활용하였기에 한결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상설원조를 하는 23개 교회원조기구의 일원으로 공식인정을 받게 되었다. 현재 긴급구호의 대종은 주로 아프리카 기아상황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지만 개발원조협의체를 통하여 아프리카 일부와 아시아 지역에서 개발사업 지원도 병행하고 있다.
1993년 원조 첫해에는 주로 아프리카 지역의 소말리아와 수단을 비롯하여 20여개국 40여개 사업에 10억여원이 지원되었고 1994년에는 르완다를 비롯한 아프리카 및 아시아 지역 20여개국 55개 사업에 10억여원, 95년 상반기까지 15개국 15개 사업에 약 9억원이 지원되었다. 또한 르완다 난민을 위하여 1994년과 1995년에 약 12억원이 지원되었거나 지원될 것이다.
국제협력의 전망ㆍ제안
한국교회가 국제협력의 일환으로 해외원조를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국제협력에 있어서 한 국가의 GNP가 5천불을 넘어서면 해외원조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본다. 오늘날 세계 55억의 인구 중 10억이 기아선상에 있으며 다른 20억이 절대 빈곤선에 처한 삶을 살고 있으며 다른 10억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있지 못한 현실속에서 빈곤의 문제는 인류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금년 5월 로마에서 열렸던 「국제까리따스」총회는 다가올 새로운 세기에 직면해야 할 도전으로 세계경제질서재편으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의 빈곤문제와 인종, 종족, 국가, 종교적 갈등문제를 양대도전으로 요약한 바 있다. 따라서 다가 올 새로운 세기에도 새로운 국제협력은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한국교회는 국제협력의 방안으로 해외원조를 확대발전시켜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해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교회내에 해외원조에 대한 이해와 관심, 참여가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제도적으로 해외원조가 주교단의 결정으로 공식화 되었으며 해외원조의 기금을 마련하는 제도가 정착되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원조성금을 보내오고 있다. 이와같은 희망적 징표를 보면서 몇가지 제안을 하여본다.
첫째는 해외원조에 대한 전교회적 동의와 참여이다. 교회구성원 모두가 신앙인으로써 가난하고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과 나눔에 대하여 신앙적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이의 실천과 참여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구체적인 예로써 1월 마지막 주일의 해외원조를 위한 2차헌금이 전국적으로 약 6억원인데 이를 신자 개개인으로 보면 2백원 미만이다. 우리나라의 1인당 GNP대비 원조기금 출연은 부끄러운 형편이다. 또한 교회일각에서는 국내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는데 해외원조를 꼭 해야만 하느냐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빈곤의 현실을 목도한다면 이러한 이의 제기는 설 자리가 없다. 둘째는 국제협력으로서의 해외원조를 수행 하는 전문적 체제의 마련이다.
해외원조는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국내에서의 불우이웃돕기 활동과는 차원이 다른 전문성이다. 선진국 해외원조기구가 전문가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를 말한다. 전세계적인 빈곤상황에 대한 정보취득과 분석, 국제적 감각, 언어와 문화의 이해, 원조사업에 대한 평가와 판단, 원조정책과 심의기준 등 원조업무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전문가 이외에도 참여자들에 대한 의식교육과 홍보, 외환관리와 재무 등의 전문가들이 필요 하다. 전문가뿐만이 아니라 원조업무를 호율적으로 관리할 논의구조,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앞으로 확대 발전될 한국교회의 해외원조는 더욱 많은 전문가를 필요로 할 것이며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들을 양성하는 일은 잠시도 유예할 수 없는 화급한 일이다.
셋째는 국제협력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의 개발이다. 해외원조는 국제협력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기는 하지만 충분한 조건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는 해외원조를 전담하는 기구뿐만 아니라 국제협력을 위한 연구소, 교육기관을 별도로 설치 하고 있으며 주교단 산하에 해외협력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한다. 해외원조에 있어서도 쌍무적 원조뿐 아니라 다자간 원조도 필요하며 원조자원도 현금뿐 아니라 인적 자원, 물적 자원의 개발도 필요하다. 원조사업에 관한 유형도 다변화되어 긴급구호 뿐아니라 복지사업, 개발 사업, 사회운동까지도 포함하는 시도가 있어야 하며 이는 대륙별 빈곤과 대처방안에 따라 국가나 원조 공여자와 수혜자의 관계도 일방적 결정이 아니라 참여적이고도 동반관계로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원조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빈곤의 근본원인에 대한 예언자적 발언과 압력, 로비활동까지를 포함하는 총체적 방안도 연구되어야 한다.
결어
한국교회는 세계화의 흐름속에서 국제협력에 대한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교회의 가르침에 국제협력의 우선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은 해외원조이다. 이는 한국이 이룩한 경제발전과 그 어느나라 교회보다도 활기에 찬 여유를 가진 한국교회가 세계와 세계교회에 공헌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인 방안이다. 한국전쟁후 세계교회로부터 막대한 도움을 받은 한국교회는 이제 과거의 도움을 기억하면서 가난하고 고통 받고 소외된 지구상의 모든 이들과 사랑과 정의와 연대 일치를 행동으로 드러내야 한다. 이는 한국교회의 중대한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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