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명윤리가 거부하는 두번째 윤리적 모델은 사회학주의적 사고에 기초한 윤리관 이다. 원래 사회학주의(sociologism)는 뒤르껭(Durkheim)과 레비브륄(Levy-Bruhl)에 의해 확립된 개념으로써 모든 인간 현상과 행동을 사회학적 도식으로 설명하고 해결하려 하는 사고를 두고 말한다. 뒤르껭은 한 사회의 윤리는 그 사회의 특성들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윤리적 사실은 원래 그 기원이 사회에 있으며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프랑스 사회학자는, 사회는 ①그 독자적인 양심(집단양심)을 갖고 있으며, ②이 집단 양심은 사회의 각 구성원이 갖고 있는 개인적 양심과 구분되며 ③집단양심은 개인양심으로 하여금 그룹(사회)의 규범을 받아들이고 이미 사회가 수용한 윤리기준들에 부합되게 행동하도록 촉구하면서 개인양심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즉 사회는 모든 가치의 거룩한 기원이며 윤리마저 결정할 뿐 아니라 개인 양심은 사회가 갖고 있는 집단 양심의 외적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사회를 신격화시켜서, 각 개인의 행위기준은 그가 속해 있는 사회적 맥락으로부터만 도출될 뿐이고 각 개인은 그 기준에 순응하는 행동만 하면 윤리적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윤리규범의 산출자인 그 사회적 맥락 자체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무엇으로 가능 할 것인가? 사회학주의자들에게는 사회를 초월하는 판단기준은 없으므로 어떤 사회적 맥락의 윤리성은 어떤 방법으로도 판단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사회가 곧 신(神)이요, 절대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통제적 윤리, 집단 순응의 윤리로서는 한 분화권과 사회의 윤리적 성장을 설명 할 수 없다. 이러한 윤리관은 보편 타당한, 객관적이고도 영구적인 윤리규범을 거부하므로 윤리적 상대주의(moral relativism)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절대적 윤리규범, 영구적, 보편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가치의 기준은 언제나 상대적일 뿐이고 따라서 가치를 구분해 내는 작업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를 뿐이라는 것이다. 다수의견, 대중의 관습이 곧 가치이며 규범이라는 식이다.
여론은 조작(操作)될 수 있다. 정치적, 경제적, 과학적 세력에 의해 한 사회의 집단양심, 여론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졸저 「삶의 윤리」중 「조작의 윤리성」참고). 조작된 사회양심은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공리주의(utilitarianism)와 쾌락주의 (hedonism)를 수용하게 만든다. 선악, 진위의 판단기준이 얼마나 자신에게 유용한지, 쾌락을 가져다주는지에 있을 때 사회 전체의 말로는 어떠하겠는가.
윤리적 선을 이 시대, 이 문화, 이 사회안에서의 유익-손해의 도식과 실리주의적, 기능주의적 도식으로 판단할 때 윤리적 상대주의는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유익을 기준으로 하는 가치평가는 다른 모든 보편적, 공동체적 윤리규범을 망각하게 만들고 개인주의적 윤리관에 젖게 만들어 인류공동체 안에서의 공생적 삶을 거부하게 된다.
이러한 윤리관에서부터 비배우자간 인공수정, 체외수정이 진행되며 다수여론이 인정하는 낙태가 쉽사리 이루어진다. 첫 시험관아기 브라운(Brown)의 탄생을 이루었던 에드와드(RㆍDㆍEdward) 교수는 말한다. 『유익이 도출된다면 그것은 시험관 배아 연구에 대한 모든 반대를 극복할 수 있다. …이 배아들은 시험관수태를 통하여 불임문제를 다루는 병원들이 보호해 놓은 배아들이 아니다. 오직 여성의 동의와 함께 적출된 난모세포 들일 뿐이다. 이것들은 자궁속에 배아를 이식할 의도없이 시험관에서 수집되고 수태된다. 이것들은 연구, 관찰, 실험의 목적으로만 사용된다』
가공할 만한 유익기준의 윤리관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말하는 유익(beneficium)은 어떤 것일까? 인간배아실험을 이 시대의 대다수 (오늘의 분화)가 받아 들인다고 해서 윤리적 가치라면 그것은 (문화적)사회학주의요, 아기제조(making baby)가 인류의 인간관 타락을 염려하기보다 한 가정에 유익을 가져다준다고 해서 윤리적 가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개인주의적 윤리관이고 유익-손해 주도의 윤리관이다.
그가 아기제조를 산과학의 꽃으로 여기는 오늘의 과학적 사고에 물들어 있다면 그것은 과학주의적 윤리관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주체이다. 그는 모든 참된 문화의 중심이요 정점이다. 그러므로 배아, 태아, 신생아 등을 포함한 모든 인간인격을 억압하거나 모욕하거 나 조작하는 것은 일탈(逸脫)이요, 더이상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문화를 거부하는 것 이다. 인간거부의 문화는 결코 윤리규범이 될 수 없다.
다수의견과 여론이 진리의 기준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진리의 기준은 오직 한 분뿐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6). 신앙인들은 여론의 지도자 (opinion leader)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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