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로 거부되는 윤리관은 과학기술주의적 윤리관이다. 과학기술과 윤리와의 관계는 모든 생명윤리 저자들의 일관된 관심사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생명윤리 발흥의 동기 중 하나라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은 참된 인식의 대상은 양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과학적 인식 뿐이며 따라서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 못되는 것은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또한 자연은 착취만 기다리는, 형상과 에너지가 없는 단순한 물질일 뿐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인간이 그 좋을대로 변용시킬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며 그 대상에는 인간 역시 포함시킨다. 그러므로 오늘의 과학은 과거와는 달리 자연과 인간에 관한 진리의 파악보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조작을 통하여 그 변용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 결과 과학은 자연은 물론 인간의 본성 역시 각종 과학적 탐구를 통하여 다양한 가변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이 과학주의적 사고를 형성하여 과학,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은 윤리적으로도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즉 과학적 가능성과 윤리적 가치 및 정당성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주의적 사고는 그안에서 추상적 이론으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즉시 실행활에 현실적으로 적용되어 대중의 윤리관을 오염시킨다. 『내가 할 수 있으니까(실현 가능성) 해도 된다(윤리적 정당성)』『내가 직접하지 못하면 과학의 도움으로 할 수 잇는 것은 무엇이든,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해도 된다.』라는 사고로 인해 아기를 갖기 위해 체외수정에, 대리모에 의존하며, 병의 치유를 위해 장기적출용 태아를 임신하기도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인간은 자신과 자연의 조작을 통하여 역동적인 자아형성 및 발전, 자아실현을 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학적 조작이 자신과 공동체의 인간성 파괴에 이용된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금지된다.
위에서 언급한 윤리관들은 생명윤리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생명윤리는 인격주의(personalism)의 뿌리를 가져야 한다. 무니어(E. Mounier)의 말처럼 인격주의는 하나의 내적태도도, 조직도 운동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철학이다. 우리는 생명윤리가 하나의 윤리철학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우리의 생명윤리는 하나의 인격주의적 윤리철학(filosofia morale personliata)이다. 이렇게 볼 때 생명윤리의 중심에는 인간-인격이 있고 그는 본질적인 윤리적 판단기준이다. 인격주의 철학에 뿌리를 둔 생명윤리는 인간을 그 본성적 특성들에서부터 파학한다. 또한 이 생명윤리는 인간을 그 존재로부터, 따라서 그존재론적 가치로부터 파악하며 그 존재론적 기반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떤 편협한 이데올로기로부터 파악되거나 도구화되는 것을 거부한다. 인간은 그 본성적 특성들이 존중받을 때 비로소 존재 자체로부터 존중받는다. 그의 자율성, 초월성이 존중되고 그에게 책임있는 자유를 요청한다.
우리의 생명윤리가 갖는 인간관은 통일적 인간관이다. 그는 육체적, 심리적, 영적 요소가 하나로 된 전체요, 지성, 감성, 의지와 육체성, 영성이 도무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몸이다. 그는 조직과 장기의 복합체가 아니다. 그는 육화된 영이다(anima incarnata). 그래서 그의 생명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의 생명권은 그의 모든 인권의 시작이요, 마지막이다. 그의 몸은 곧 그다. 그는 살아있는 관계 그 자체이다. 그의 관계성은 우리의 생명윤리로부터 끊임없이 존중받아야 한다. 그것은 그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레게는 공동체적 규범이 필요하다. 오늘의 생명윤리는 강한 사회윤리적 규범의 윤리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개인주의적-자유주의적 윤리관은 거부된다. 책임없는 자유란 그의 본성적 요소가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인격에 강한 전체주의적 윤리관에 희생되어서도 안된다. 개별인격은 더 근본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인간 주변의 모든 것은 인간과 함께 인간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의 인격주의적 생명윤리는 자연을 착취와 소진, 조작의 대상으로만 보는 과학주의적, 기술주의적 인간(homo faber, homo technologicus)을 거부한다. 그런 인간에게는 존재보다 실행, 기능, 소유가 더 중요하고, 그래서 목표를 수단에 용해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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