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중 한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도미니꼬회 이브 콩가르 추기경이 지난 6월 22일 91세의 일기로 선종했다. 본보는 제2차 바타칸공의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교회일치 및 교회쇄신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콩가르 추기경의 생애와 신학적 업적을 2회에 나눠 소개한다.
금년 6월 22일에 20세기 가톨릭의 저명한 신학자 이브 콩가르 추기경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이 매스컴에 올랐다. 이 기회에 그분의 생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교회론과 에큐메니즘에 대한 기여를 회상해보기로 한다.
1904년 프랑스 세당에서 출생한 이브 콩가르는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같은 또래의 개신교 친구들과 접촉의 기회를 가질수 있었고 전후 동유럽에서 피난나온 정교회와 유대인 친구들을 사귈수 있었다. 그는 빠리 가톨릭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러 솔솨르에 있는 도미니꼬 수도회 신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도미니꼬회 수사신부로 1930년 6월 25일 서품되었다.
1931년부터 모교에서 기초신학과 교회론을 가르치면서 일치운동에 깊이 참여 하기 시작하였다. 서품직후부터 독일의 하일러가 주도하는「고교회」잡지를 접하면서 루터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여 베를린, 바르트부르크, 엘푸르트, 빗덴베르그 등지에서 루터를 탐구하였다.
빠리에서 개신교 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이해하게 되었고 칼 바르트와 접촉을 시작하였다. 그는 또 베르디아에프, 마리땡, 무니에 등 러시아 연구가들과 교류하면서 러시아 신학자 코미아코프를 깊이 연구하여 정교회 신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무렵 그는 성공회 인사들과 가톨릭 인사들의 비공식 그룹인「말틴대화」를 통하여 헤머 신부와 키드 박사를 접하면서 성공회를 이해하여 이「대화」의 창시자인 뽀르탈 신부의 정신에 심취하였다.
1932년부터 보드웽 신부,「일치기도주간」의 창시자 꾸뛰리에 신부, 리아린 신부들과 협력하여 가톨릭 안에서의 일치운동의 확산을 도모하였고 35년에 일치기도 주간이 시작된후로 30여년동안 전유럽과 중동 아시아 여러도시에서 설교여행을 계속하였다.
성공회나 정교회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어질수록 함께 살고 있는 개신교에 대한 관심은 커져서 양교회 신자대중들의 상호 오해를 풀어나갈 홍보노력이 필요함을 절감한 나머지「지성생활」잡지에 프로테스탄티즘을 소개하기 시작하였고 현대인의 불신앙의 원인은 가톨릭교회가 복음에 충실한 삶의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데 있다고「지성생활」지에 연재하면서 교회론 연구의 촉진을 위하여「우남쌍땀」(Unain Sanctam)문고를 창설하였다.
한편 1936년 1월 일치주간에 행한 특강이 큰 반향을 불러왔다. 모든 그리스도교파들이 그의 과감한 교회비판과 타교파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대하여 경악했던 것이다. 이 강연집은「우남쌍땀」문고의 1호로 배포되었는데「분열된 그리스도교도」라는 제호로 알려졌다. 이 책은 가톨릭 각계 각층의 성직자 신자들에게 일치운동의 의미를 크게 인식시켰고 비가톨릭 일치운동가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Wcc의 톰킨스 목사는 이 책이야 말로 가톨릭의 일치운동의 역사적 분수령이라고 극찬하였다.
1935년에서 1939년사이에 콩가르 신부는 12개의 불어 독어 영어잡지에 교회론과 일치운동에 관하여 정기적으로 기고하면서 신학교 신학부 연수회 등에서 강의 설교 강연 등으로 몹시 분주하였다.
1939년에 그는 그의 스승 셔뉘 신부와 함께「분열된 그리스도교도」(1937)때문에 로마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다. 그후 그는 2차세계대전에 동원되었고 포로가 되어 독일의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민족과 사상과 신앙의 분리와 갈등을 체험하면서 일치운동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였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귀국하여 보니 자신은 부재중이라 변했지만 스승 셔뉘 신부와 친구 페레 신부는 일치운동에 대한 진보적 견해 때문에 대학강단에서 쫓겨나고 그들의 저서는 출판금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교회의 전례운동 성서운동 평신자운동에 신학자로서 협력하고 있었다.
1947년에는 앞서 말한「분열된 그리스도교도」(1937)와「교회신비의 탐구」(1941)가 다시 문제가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이 책들이 비가톨릭교파에 대하여 너무 적극적인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제네바에서 wcc(세계교회협의회)준비를 위한 가톨릭의 입장이란 글이 저지당하였고 그 이듬해 (1948)결성키로 된 wcc에 옵서버를 보낼 준비도 저지 당하였다. 1950년「교회안에서의 진짜 개혁과 가짜 개혁」(1950)을 출판한일로 인하여 로마는 그를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었다. 같은해에 로마는 성모승천 교리를 도그마로 선포하는 바람에 비가톨릭 교계는 맹렬한 분노와 반대를 일으켰고 교회내의 일치운동 그룹들은 실망하여 해산해버렸다.
이후로 그는 극도로 조심하면서 외적 활동을 자제하다가 1951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행한 루터에 관한 강연이 로마에 고발되었고「교회안에서의 진짜 개혁과 가짜 개혁」(1950)은 재판이 금지되었다. 1952년부터는 일체의 논문뿐만 아니라 사소한 서평까지도 사전검열에서 저지되었고 가장 무난한「평신도 신학도표」(1953)만이 출판 될수 있었다.
1954년 정교회와의 분리 9백주년에 즈음하여 양교회 신학자들의 합작으로 된「교회와 교회들」이란 책에「9백년후 동방이교」를 쓰고나서 중동 여러 도시에 순회강연을 하고 빠리에 소환되어 보니 셔뉘, 페레, 봐슬로 신부들이 콩가르 신부와 함께 활동금지를 당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칩거하면서「성전의 신비」를 썼으나 일곱번의 검열을 거쳐서 3년후에야(1958)출판되었다.
1954년에서 55년까지 석달동안 로마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고 영국으로 추방되었다가 연말에 귀국하여 스트라스부르그 수도원에 거주제한으로 있으면서 소규모의 사제 활동밖에는 할수 없었다.
1955년에서 59년까지 그는 큰일이 이루어지기 위하여는 얼마나 많은 시련과 실패와 좌절과 박해를 통하여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한가를 절감하면서 일치운동과 교회의 쇄신 기미를 주시하고 있었다.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