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지난50년간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가 놀랄 만큼 성장을 향해달려 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민족분단으로 인한 반쪽만의 성장이라는 아픔을 간직해와야만 했다.
반쪽만의 발전으로 만족해야만 했던 한국 천주교회는 이제 광복 50주년을 맞아 완전한 발전으로 미래를 채워나갈 디딤돌로 삼으려 몸부림치고 있다.
가톨릭신문은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특별기획「광복50년, 한국 천주교회를 조명한다」를 마련, 미래의 한국 교회를 조명해줄 지난 50년간의 한국 천주교회의 발자취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별기획「광복50년 한국 천주교회를 조명한다」는「광복 이후 한국천주교회의 교세 성장」「전례 쇄신과 신앙생활의 변화」「교회 행정 기구 및 신자 재단체의 발전」등 3회에 걸쳐 연재된다.
◆50년간 교세성장
본당의 도시 집중화 대형화로 인한 냉담자문제해결 급선무”
84·89년 교황 방한으로 젊은이들 입교에 큰 영향끼쳐
1993년도 한국 천주교신자 총수(94년도 교세 통계는 아직 미발표됨)는 총3백20만9천4백94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1945년 광복 당시의 신자 총수18만8천6백66명에 비해 17.0배 신장한 수로 광복 50년 동안 무려 3백2만8백28명이 영세 입교했다.
광복 당시 18만8천여명에 불과했던 한국 천주교 신자 수는 29년뒤인 1974년 처음으로 신자 1백만을 돌파하더니, 다시 12년뒤인 1986년에 2백만을 넘어 총2백14만8천6백7명을 기록했다.
한국 천주교회는 또 다시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의 여파를 몰아 신자 2백만돌파 6년만인 1992년에 신자 총수 3백6만6천7백33명을 기록, 대망의 3백만을 넘어, 전체 인구비 7.29%의 복음화율을 자랑했다.
1784년 이승훈이 한국인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이 땅에 천주교 신자 1백만명이 탄생하는데는 무려1백90년이 소요됐으나 다음 1백만명을 넘기까지는12년, 6년으로 단축되는 괄목한 성장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 교세 성장의 원인
한국 천주교회가 이전까지 교세 성장이 답보상태에 있던것이 광복 이후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신자들이 급속히 증가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으로 교회 학자들은 먼저 성직자 수의 증가를 손꼽는다. 광복 당시 1백36명에 불과하던 한국인 성직자 수는 93년도 12월말 현재 한국인 신부만 1천9백63명으로 1천8백27명이 늘었으며 이 수치는 교세 성장율과 거의 일치하는 14.4배의 성장율을 나타내고 있다.
즉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일치하고, 한국인의 심성을 읽은 한국인 성직자들이 급속히 배출됨에 따라 직접선교의 환경이 최대로 확대됐기에 지금의 교세 신장율을 나타낼 수 있었다고 진단할 수 있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 참여와 예언직 수행을 지적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70년대 유신독재에 항거한 정의구현 운동과 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과 6.10, 6.29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 사회 정의구현 운동은 남한 사회의 복음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사회 정의구현운동을 통해 교회가 민족의 미래에 대한 책임의 일부를 부여받고 있음을 천명함으로써 많은 젊은이들과 지성인, 대중들을 신앙의 울타리 안에 수용할 수 있었다.
아울러 한국 천주교 2백주년 행사와 제44차 서울세계성체대회에 참석코자 2차례나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카리스마적인 사목방문이 한민족 복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거대본당의 출현은 사목자와 신자간, 신자와 신자 상호간의 영적 지도와 삶의 나눔을 이완케 했고 신자들간의 신앙적 교감을 흐트려 놓고 말았으며 냉담ㆍ행불자가 급속히 증가하게 됐다. 따라서 다가오는 2천년대를 대비, 새로운 형태의 본당 사목정책과 신자관리 대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복음화운동의 연대별 특징
한국 천주교회의 교세 신장율을 분석하면 각 연대별로 복음화를 촉진시키는 뚜렷한 특징들이 나타난다.
우선 각 연대별 연평균 신자증가율을 보면 휴전이후 1950년대 16.5%, 60년대 6.2%, 70년대 5.2%, 80년대 7.6%, 90년대에 들어 93년까지는 연평균 5.3%의 증가율을 보여주었다.
광복 이후 지금까지 가장 높은신자 증가율을 보인해는 1958년도로 전년대비 24.2%의 증가율을 기록했고, 가장낮은 해는 1971년도로 0.29%의 증가율을 보였다.
1950년대 한국 천주교회가 연평균 16.5%라는가공할 신장율을 보인데는 6·25 이후 교회의 전쟁구호활동에 따른「밀가루 신자」가 속출한 영향도 있지만 전쟁의 참화가 가져다준 시대상의 참혹함이 대중들의 종교심을 일깨워 천주교에 귀의케 한 요인이 그것보다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예로 1950년대는 전쟁 직후 지성인의 개종 현상을 들 수 있다. 이들 저명한 지성인들의 천주교 입교는 복음화의 또 하나 자극제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지성인들의 입교 현상은 70년대 이후 또한번 일어난다.
1950년대 복음화 운동의 또하나 특징은「레지오 마리애」를 비롯한 각종 신심단체의 도입과 수도단체들의 진출을 손꼽을 수 있다.
이들 봉사활동과 가톨릭 신심운동은 복음화의 촉진제가 됐다.
1960년대 한국 천주교회는 62년 3월 10일자로 대목구이던 한국의 13개 교구가 정식교구로 승격되고 서울, 대구, 광주, 교구가 대교구로 승격, 교계제도를 확립하면서 자립의 발판을 다졌다.
그러나 6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신자수 증가에 새로운 상황에 부닺치고 만다. 60년대에 들어와서 신자증가율이 급격히 하락, 연평균 6.2%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둔화 현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구의 세분화에 따른 위기감과 사목적 정체현상이 한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그보다 한국 천주교회가 특정 정권과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전환기의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비판 기능을 상실한데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진단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여파는 1970년도 신자 증가율이 1.17%, 71년도 0.29%로 떨어져 한국 천주교회로 하여금 절대절명의 위기감으로 몰아 붙였다.
선교정책의 일대 전환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 천주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기초로 한 자기 쇄신에서 그타결책을 찾아나갔다.
이에 한국 천주교회는 1970년대에 들면서 유신 독재에 항거하면서 선교 정책을「사회 참여」라는 대전제안에서 수정했고, 민족 대다수와 호홉을 같이하는「정의구현운동」의 큰 물줄기를 타고 60년대부터 침체돼 왔던 복음화율을 만회하기 시작했다.
한구 천주교회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1980년대는 교회의 사회 참여뿐 아니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목방문이 한국 사회의 복음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은 종교와 이념을 달리하는 한국민 전체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을 뿐 아니라 특히 젊은이들에게 내재돼 있던 종교심을 발로시켜 교회로 찾아들게 했다.
아울러 1980년대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의 내적 성장을 눈으로 확인하는 증거의 시대였다.
조선교구 1백50주년, 한국 천주교 2백주년, 103위 한국순교 성인 시성, 제44차 서울 성체대회 등 4단계에 걸쳐 실체를 확인한 한국 천주교회는 90년대에 들어 신자 3백만을 돌파하면서 축적된 내적 성숙을 발판으로 새로운 중흥기를 모색하고 있다.
▩교계 조직의 성장
광복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서울, 대구, 광주, 전주, 춘천, 평양, 함흥, 연길, 덕원면속구 등 9개의 교구가 전국을 관할했다.
광복 이후 10년이 지난 1955년만 해도 전국의 본당은 1백38개 뿐이었고 경당이 3백4개, 공소가 9백90개소가 됐다.
본당수가 이토록 열악한 이유로는 국내 성직자가 총2백64명(한국인1백95명, 외국인 69명)뿐으로 절대수의 성직자가 부족했던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성직자 수의 증가와 함께 교회 행정체제가 안정됨에 따라 본당수는 급속히 증가한다.
한국인 성직자가 처음으로 2백명을 넘은 1956년(2백12명)을 기점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본당 설립 양상은 활기를 띠는데 57년에는 무려 전국에서 44개의 본당이 신설됐다.
1958년도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본당이 2백개소를 넘어 2백24개소를 기록했는데 이는 57년 1백79개소에 비해 45개소가 늘어났다.
1962년 3월 10일 교계제도가 확립될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2백75개의 본당을 확보했고, 광복20주년인 65년도에는 처음으로 3백개소가 넘는 3백13개의 본당이 전국으로 분포됐다.
▩본당 증설 현황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페막된 1965년을 기점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본당 증설은 1980년대까지 평균5~6년주기로 신설 본당이 1백개씩 늘어나는 재미나는 현상을 보여준다. 즉 1970년도에 4백15개로 4백개소를 넘었고, 1976년 5백7개소로 5백선, 1981년도에 6백17개소로 6백선, 1986년도에 7백13개소로 7백선, 1990년도에 8백55개소로 8백선을 돌파했다.
또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1992년도에 전국 본당 9백개소를 넘어 9백18개를 기록, 2년만에 1백대선을 돌파하는 초단기 신기록을 세웠다.
1990년도 전국 신설 본당 79개, 91년 28개, 92년 35개, 93년 29개 등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 4년동안 본당 1백71개소가 늘었는데,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신설 본당이 급증한 이유는 이미 언급한대로 사제수의 증가와 맞물린다. 그 증거로 이 시기에 증가한 한국인 사제수는 총 4백59명에 달한다.
▩본당 편중에 따른 문제점
광복 당시 남북한 전체 1백36개소이던 본당수가 93년 현재 남한 교회만 본당이 9백47개소로 총7배가 늘어났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도 없지 않다.
그중 가장 큰 사목적 해결책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신자들의 도시 집중화에 따른 대도시 교구의 본당 증설 현상을 꼽을 수 있다.
1983년도와 1993년도 각 교구별 본당증가 현황을 비교분석해 보면 대도시가 딸린 서울대교구 43개, 대구대교구 23개, 광주대교구 20개, 수원교구 17개, 부산교구 16개, 전주교구 19개 본당이 신설된 반면, 춘천교구 6개, 원주교구 4개, 안동교구 3개, 제주교구 3개 등 중소도시 및 농어촌지역 교구들은 저조한 본당 증가율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10년 사이에 기존교구 사제수의 배이상 또는 배에 가까운 수의 새 사제를 배출한 청주교구와 마산교구는 농촌지역교구에도 불구하고 각 14개 본당을 신설하는 성장을 보여 사제배출이 지역교구의 교세 성장에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가를 증거해주고있다.
본당의 도시 집중화 현상의 또다른 문제점은 거대 본당의 탄생으로 인한「신자 공동체」로서의 상실감을 들 수 있다. 물론 신자들이 있는 곳에 본당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거대 본당의 출현은 사목자와 신자간, 신자와 신자 상호간의 영적 지도와 삶의 나눔을 이완케 했고 신자들간의 신앙적 교감을 흩트려놓고 말았다.
이는 곧바로 냉담자 문제를 야기시켜 광복이후 1954년 냉담자 행불자 수가 총 신자수의 4.4%에 불과하던 것이, 1993년에는 24.7%나 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천주교회가 본당 거대화와 도시 집중화 문제를 타결하고 냉담자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소공동체 운동과 구역반모임, 직장사도직 활성화 등 다양한 대안을 내놓고 있으나 아직 미진한 부분이 많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다가오는 2천년대를 대비 새로운 형태의 본당 사목정책과 신자 관리 대안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이를 위해 복음화와 신자관리 측면에 주안점을 두고 신앙적 재무장과 새복음화의 기틀을 마련해 나가는 다양한 사목 연구가 필요하며 본당 사목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사목연구소 설립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광복 이후 지난 50년간 한국 천주교회의 교세 성장을 분석하면서 복음화는 교회가 사회깊숙이 참여 하여 민족과 호흡을 같이 하고 그 시대마다 마다에 현재와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예언자적 소명을 다할 때 성공적으로 얻어지는 은총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광복과 함께 민족 분단과 교회의 분단을 함께 경험해야만 했던 한국 천주교회가 민족의 보편적구원에 기여하고 민족 복음화의 활로를 개척하는 예언자적 소명으로 민족 화해와 일치운동에 총체적 역량을 모아 나가는데 전체교회가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줄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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