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례쇄신
2차 바티칸공의회후 전례변화 뚜렷
미사통상문ㆍ각종 예식서 번역 활발
평신도 성체분배권 부여ㆍ「손으로 영성체」등 획기적
광복후 50년간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전례의 변화이다. 신앙생활의 중심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인 전례의 변화는 당시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상당한 충격과 신앙생활의 근본에서부터의 변혁을 요구했다.
한국천주교 전례의 대변혁은 단연 1960년대 중반 바티칸공의회에 기인하고 있다. 이 공의회는 하나의 개혁, 혁명과도 같았다.
신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틴말로 미사를 봉헌하던 사제, 그 사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해야했던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공의회는 사제와 신자가 마주보고, 라틴말이 아닌 모국어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커다란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초기 교회부터 해방이후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한국가톨릭 교회의 전례는 별다른 특징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단지 이 시대의 한국 교회 전체가 그러하듯 전례가 평신도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을 수 있다.
당시 성직자 수가 부족했던 한국교회는 공소(公所)를 중심으로 소위 공소회장에 의해 전례가 행해졌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공소전례를 위해 여러가지 지도서를 내놓은바 있다.
최초의 지도서로「장주교 윤시 제우서」를 필두로「회장필지」「회장본분」「한국가톨릭 지도서」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1917년과 1918년에「경향잡지」에 연재된「회장직분」이 있고, 중국 경도(京都)에서 발간된「회장규조」와 그 변역본이 있다. 이 지도서에는 주일과 대축일에 공소에서 행해야 하는 직무와 성사 집전에서의 공소회장의 역할과 권한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즉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한국 교회는 뚜렷한 전례적 특징보다는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전례가 거행됐고, 전례시 평신도들의 주도적인 역할이 뚜렷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또 이 시기의 공소중심의 전례방식은 거대화 다양화된 현재 한국교회의 소공동체 운동의 모델로서도 평가되고, 연구되어야 된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전례적 상황에서 가장먼저 전례의 변화를 시도됐던 것은 1964년 9월에 공의회 제3회기가 시작되기전에 인천교구에서부터다.
1964년 9월 4일 공의회 참석차 출발할 것을 알리는 공문에서 인천교구장 나 굴리엘모 주교는 동년 8월 30일부터 교구내 모든 성당에서 미사를 신자들을 향해(versus populum) 봉헌할수 있다는 특허를 교구내 모든 신부들에게 부여했다. 즉 이때부터 한국교회에는 제대의 방향이 벽을 향해 있었던 것이 신자들을 향하게 됐고, 이는 하나의 충격으로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공의회 이후 한국교회는 1964년 4월 21일부터 23일까지 열렸던 전국주교회의에서「전례위원회」를 설립하고 그해 5월 19일에「전국전례위원회 제1차 회의」가 가톨릭대학에서 개최, 변화되는 세계교회의 기류에 대처하기 시작 했다.
「모국어」전례를 허용한 공의회 정신에 따라 한국교회는 전례위원회를 중심으로 이에대한 논의를 거처 1965년 1월 1일부터 미사경문의 일부분이 모국어로 사용됐으며 1967년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서울에서 열렸던 주교회의를 거쳐 동년 8월 30일 교황청으로부터 인준을 받아 완전한 모국어 미사를 드리게됐다.
이를 계기로 이때부터 한국천주교회는 활발한 전례서 번역작업이 시작된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1965년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 총회를 열고「가톨릭 공용어 심의위원회」를 발족, 기도문과 미사통상문 그리고 축일표 개정과 각종 예식서를 번역토록했다.
1967년 3월부터 교황청은 미사 전문 전체를 모국어로 할수 있도록 허락, 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1969년 9월 24일자로 미사 전문 한국어 번역을 교황청으로부터 인준받아 1976년 완역, 미사의 모든 부분을 한국어로 사용하기에 이른다.
한국교회의 전례서 번역이 가장 활발히 벌어졌던 이 시기에는 미사경문뿐 아니라「수도서원예식서」(1970), 「부제, 사제, 주교 서품예식서」(1973), 「병자 성자 예식서」(1975), 「장례예식서」「어린이 세례예식서」「어른입교예식서」(1976), 「성당축성예식서」, 「성무일도서」(1978), 「견진성사 예식서」(1983), 「성모미사경본」(1988) 등 교회 전례와 관련된 우리말 번역서들이 근 20년간의 번역작업을 거쳐 속속 신자들의 손에 쥐어지게 됐다.
더군다나 1987년 한국교회는 추계주교회의 총회에서 미사 통상문의 새로운 번역작업을 추진, 최근에 그 완성을 보게 되는 등 전례분야의 활발한 작업이 펼쳐지고 있다.
한편 한국 천주교회는 이러한 번역작업과 때를 같이해서 1970년 또 하나의 변혁을 겪게 된다. 70년 가을 주교총회에서는 교구장 재량으로 주일과 의무적 축일 미사를 그전날 저녁에 지낼 수 있는 특전을 승인, 이른바「토요특전미사」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바라보며 산업화공업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70년대의 사회 흐름속에서 어쩔 수 없이 파생한 전례적 선택이었다.
특히 70년대 들어서 한국교회는 교회의 각종 전례 예식서가 간소화되고, 평신도를 포함한 사제아닌 사람이 성체를 분배할 수 있는「성체분배권」을 비롯 손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손으로 영성체」등의 전례부분의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미사전 공심재가 1시간으로 축소됐으며 80년대에 들어와서는 매주 금요일을 단식일로 정해 나눔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공고히 했다.
이처럼 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가톨릭 교회의 전례는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80년대 말부터 제기된 전례 토착화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한국교회는 전례 쇄신운동과 토착화 작업을 해내야 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해방이후 엄청난 변화를 겪은 한국교회의 전례는 한국이라는 토양에 깊숙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사목적 전례 쇄신 운동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주교회의 전례위원회뿐 아니라 전례연구소와 교구별 전례위원회 등 기구와 연구소 설치가 필요하고 이러한 기구를 통해 신자들에게 충분한 교육이 필요하다. 또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의식적으로 전례에 참여하는 살아 있는 전례가 되기 위해 시대의 흐름에 따른 사목적 요구에 적응하는 전례개혁이 이루어지도록 끝없는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해방 50주년을 맞는 한국 교회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회는 그 시대의 징표를 바로 알아들어야 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결정체인 전례로 표현되기 위해 교회는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 신자생활 변천
핵가족화로 개인중심신앙 초래
「보여주는」 외향에만 너무 치우쳐 안타까워
신자간 친교결여ㆍ신심활동에 “불충실”
「신앙이 순교」라는 선조신앙 본받아야
『매양 항상 치명할 예비를 힘쓰며 가인을 교훈하되 자기는 적게하고 깨기는 많이 하여(중략)…좋은 일은 사양하고 궂은 일은 앞서하니 모두 열복하더라』
한국교회 초창기 1백년 박해 기간동안의 신자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기해일기」의 한토막이다.
신자생활을 이어 나간다는 자체가 어려운 가운데서는 슬기롭게 대처하며 나름대로의 엄격한 생활을 이어가던 초기교회신자들. 신앙생활이 조선말기 유교관에 기초한 사회생활과 정면으로 배치되던 당시 그들에게는 오직 하느님에 대한 순종과 믿음이 그 생활상을 규정하는 전부의 요소였다.
이후 50년 간의 일제강점기에는 복잡해져 가는 사회구조와 외국선교사들의 대량 유입으로 신자생활에 보다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외국선교사들에게서 오는 이질감으로 한국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정체성을 띠게 됐으며 오히려 기복적인 성격이 가미된 수동적인 신앙으로 변화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해방이후로 접어들면서 교계제도와 사회구조의 급속한 변천은 교회내 신자생활의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 사회구조변화와 신자생활
해방이후 한국교회는 6ㆍ25동란을 겪으면서 소위「밀가루신자」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극심한 경제난에 허덕여야 했다.
이러한 경제적인 이유와 1970년대 대가족제도의 해체에 다른 핵가족의 증가로 교회에서는 종래의 가장중심의 신앙생활에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에로의 변화가 나타났다.
예를들면 부모가 개신교인 이라도 자녀들이 성당에 나오는 경우가 가능해 졌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결국 신자생활이 다분히 개인적인 것으로 귀속된 것이다.
한국 외국어대 한홍순 교수에 다르면 1960년 도시화율이 25%에 불과하던것이 1990년에는 74.4%로 증가한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체 인구의 4분의 3정도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불거진 본당 대형화 현상은 신자들의 익명화를 초래했고 결국 신자 개개인이 사목자의 효과적인 신앙지도를 발을 기회를 축소 시켰다. 이는 체계적인 신자재교육 미비와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과 맞물려 형식적인 신앙생활과 냉담자 양산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켰다.
가진것 중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서너시간 전에 집을 출발해 산길 들길을 따라 묵주기도를 하며 성당으로 향하던 신자들이 1990년대 들어서는 반바지를 입고 10분전에 집에서 출발해 자가용을 타고 성당에 가고 있다.
▩ 교계변화와 신자생활
한국교회는 1960년대에 들어 방인 성직자 양성이 본격화하면서 자립의 의지를 키우게 되는데 수동적인 성사생활에서 능동적인 심신운동 활성화로 신자생활양식이 변천하게 되는 계기를 바로 이 교회자립 움직임에서 찾을 수 있다.
교계제도의 설정(1962년)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공의회 문헌이 한국어 번역본으로 나온것은 1969년)는 이러한 교회자립 움직임을 부추겼으며 이후 1970년대 전례변화와 전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신자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70년 주교총회를 거쳐 종래의 입으로만 가능했던 영성체가 소위「손으로 영성체」로 전환된 것 등 이때부터 간편해진 전례는 신자들이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신자들의 능동적인 신앙생활을 가능케한 교계제도 변화는 바로 교회 제단체의 설립 붐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에 급속히 보급된「꾸르실료」「ME」「MBW」등은 신자들의 신앙생황영역을 더욱 확장시켰으며「정평위」「인성회」는 전 교회신자들의 신앙활동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는 창립 2백주년과 교황방한 103위 성인 시성 등 굵직한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행사들은 신자들에게 자부심을 불어 넣기에 충분한 대규모 행사들로 치러졌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대형 행사를 거치면서 신자들의 생활은「보여지는것」인 외향중심의 양상을 띠고 전개되기 시작했다.
교리와 성서지식등 체계적인 신자 재교육이 미미한 시점에서 신자들은 1990년대 다변화 시대를 맞이했다.
결국 1990년대 들어서는 신자 소득수준의 평준화와 중산층화, 냉담자 증가, 신심활동의 형식화, 주일근무 직장의 증가로 인한 미사 불참례, 본당대형화로 인한 신자간 친교부족 등 신자생활의 활력을 빼앗는 요소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 5월 가톨릭신앙 생활연구소(소장=신처구)가 조사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한국 교회 신자생활의 가장 큰 걸림돌이「성서와 교리 지식의 부족」이라고 응답한 신자가 50%를 웃돌고 있다. 또 10명중 7명은 한국천주교회의 당면한 문제점을「교회의 중산층화」에 기인하는 일반 신자들의「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로 꼽고 있다.
과거 60~70년대 교회변화를 주도하면서 격변의 사회를 이끈것은「교리문답」을 달달 외웠던 당시 신자들이었다.
간편하게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여가의 하나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확산되는 오늘날, 신앙이 바로 순교라는 현실로 이어졌던 박해시기 신자들이 생활상은 하나의 모범으로 다시금 제시되고 있다.
「기해일기」등에 나타난 선조들의 생활상을 부각시키자는 목소리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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