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지난 3월 25일 그리스도의 탄생 예고 축일에 반포하신 회칙 「생명의 복음」을 이렇게 시작하고 계신다. 「생명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 강생의 신비와 이 세상에서의 당신 사명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금년 광복 50주년과 남북 분단 50주년을 맞이하여「생명의 복음」을 살고 전파하는 생명운동을 돌이켜 보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염원하는 우리에게 생명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과연 중요하고 시급한 일일까? 생명의 복음이 복음의 핵심이듯이 생명운동이 과연 민족의 복음화와 민족 통일의 핵심적 문제일까?
언젠가 한국을 방문한 마더 데레사는 통일을 소망하는 한국민에게「진정으로 남북의 통일을 원한다면 먼저 부모와 태어날 아이들의 일치와 화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매우 의미 깊은 지적으로써 그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비율의 낙태를 자행하고 있는 한국민에게 뼈아픈 충고가 담겨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부모와 자녀가 일치 못하는데 어찌 남남이 일치할 수 있겠는가? 민족의 과제인 통일에 접근하기 위하여 좀 더 근원적이고 내면적인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 우리 사회의 반 생명 현상
1960년대 이전의 한국은 매운 수준 높은 생명문화 민족이었다고 본다.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나이를 계산하여 태어나면 아기의 나이를 이미 한 살로 간주하였고 교육 또한 태교부터 실시한 민족이었다. 크리스천 문화권인 서양 그 어느 곳에서도 보기 드문 내용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하였는가?
비록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문턱에 다다랐다고는 하나 정신적으로는 유아기적 가치관 결핍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무너져 내린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처럼 외형은 번듯하나 속은 부실한 이기적이며 반생명적인 기형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생명적, 비도덕적 사회 문제는 사회의 기본 세포인 가정의 문제요 결국 우리 자신들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무엇보다도 두드러지고 감추어진 반생명현상은 낙태이다. 전쟁 후 생활이 극도로 어려운 1960년대만 해도 낙태를 연간 10여 만 건을 넘지 않았었는데 1973년 모자 보건법이 제정되어 낙태를 일부 허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낙태는 급속히 증가하여 1978년경에는 이미 낙태 건수가 80만을 넘어섰고, 1985년의 연간 낙태 건수는 1백50만에 이르렀다.
수백 명의 인명을 앗아간 대형 참사들이 국민의 관심과 애도 속에 기억되고 있는 것에 반하여 하루에 4천~5천명의 아기들이 피임 실패 혹은 단산 등의 이유로 희생되는 낙태는 기억조차 꺼려지고 있다. 인류 가족 중의 가장 연약한 태아의 생명권은 정부, 부모, 의료인, 교육인, 그리고 심지어 종교인들의 방임 내지는 침묵 속에서 찢기고 내팽개쳐져 왔던 것이다.
낙태 외에도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반생명적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부녀자 성폭행과 인신매매, 그리고 자동차사고 및 사망률과 산업 재해는 세계 수준급이다. 대기나 수질 오염상태 또한 지금 다른 어느 나라보다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아직은 다행히 우리나라에 안락사가 시행되고 있다는 보고는 없지만 낙태에 대한 태도에서 보듯 인간의 생명을 사회적 기능과 경제적 효용가치, 그리고 현실적 편의에 따라 판단하는 경향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이 일 또한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 생명 경시 풍조 이면의 반 생명 사조
오늘의 생명 경시 풍조는 하루아침에 조성된 것이 아니다. 근세 인본주의 일부 조류는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보는 종래의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을 버리고 기계론적 인간관을 택하였다. 인간은 더 이상 신비의 대상이 아니며 그저 단순히 복잡한 기계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 뒤 공산주의 유물론이 등장하면서 인간은 단순한 물질의 일부로 간주되고 인간의 가치는 사회주의가 그 가치를 부여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게 되었다. 그러한 이론에 입각하여 구 소련은 1920년에 낙태를 자유화했던 것이다.
다윈의 사촌 동생인 프란치스 골튼의 우생학이 등장한 것도 이즈음인데 우생학에 따르면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인간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인간이 있다. 급진적 우생학에 의하면 장애 및 저능아는 제거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이 이론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히틀러는 수십만의 장애인들을 제거하였고, 유태인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은 채 6백여만 명을 서슴없이 무참하게 학살했던 것이다.
소위 산아제한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시행하기 시작한 마가렛 생거 여사가 1914년에 창설한 산아제한협회도 장애자를 위하여 정부의 예산을 집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보는 시각이었다. 소위 잘난 사람은 아이를 더 많이 낳도록 하고, 못난 사람은 아이를 못 낳게 하든지 덜 낳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위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이 삶의 잣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생명적 현상은 엄청난 자금 지원을 받아가며 지지되어왔고, 이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낙태나 안락사 등을「권리」와「자유」라고 표현하고 있다.
▣ 생명운동
생명운동은 죽음의 문화와 대조를 이룬다. 「죽음의 문화」는 하느님을 떠나는 죄에서 시작되었고, 아담과 에와, 카인,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등의 성서 이야기는 죄로 인한「죽음」의 길이 무엇인지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생명운동은 바로 신앙운동이고 복음화 운동인 것이다. 이 운동의 첫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고 그 목표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몇 해 전의 한 설문에 의하면 천주교 신자의 70여%가 낙태는 국법으로 전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허용하기를 바란다고 응답하였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소위 신앙인이 그 신앙의 대상이신 하느님을 전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거절한다는 표현 아니겠는가? 과연 복음화란 무엇일까?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태아도 여기에 속한다)을 그리스도로 인식하는 것, 이것이 복음화의 핵심이요, 이는 바로 최후의 심판의 주요내용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시 환경운동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환경운동을 생명운동이라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인간은 마땅히 아름다운 자연을 돌보고 성실히 보존할 의무가 있다.
특히 요즘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자연 파괴와 각종 공해 현상 또한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한 반생명적 현상인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교회의 생명운동은 이런 모든 반생명적 현상에 대해 고르게 관심을 갖고 대처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환경운동을 생명운동이라고 하면서 매일 같이 4천~5천명의 아기들이 희생되는 낙태를 거론조차 않고 지나간다면 매우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
▣ 누가 생명운동을 해야 하나?
우리나라의 생명운동의 겨자씨는 작년에 작고하신 박토마 주교님과 뜻있는 의료인들에 의하여 뿌려졌다고 본다. 초기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인간생명 존엄성에 관한 교황청 문헌들을 그때그때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을 해왔으며 특히 모자보건법이 만들어지던 1972년 11월에는「인공유산과 피임」 이라는 성명도 발표하면서 인공유산 입법 반대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로는 역시 선언적인 의미 이상의 별다른 생명운동으로 조직화 되지는 못했다. 다만 1974년 추계 주교회의 결의에 의해 다음해 5월에 정식 발족한 행복한 가정운동이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직접 간접적으로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임신 및 출산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꾸준히 실천해온 교회 생명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구마다 그 활동 내용이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나 현재 이 행복한 가정운동은 매년 혼인을 앞둔 남녀들과 부부들에게 자연가족계획 방법을 소개 또는 직접 지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본당, 학교 및 산업시설의 청소년들에게 순결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이들에게 올바른 성 의식을 심어 주고 있다.
그리고 지난 몇 년 동안 낙태에 관한 비디오와 유인물들을 제작하여 전국에 보급해온 마리아수녀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수녀회에서 제작한「침묵의 절규」「이성의 소멸」 등의 낙태 관련 비디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낙태의 실상을 깨닫게 해주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생명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991년 4월 30일 서울대교구 한마음운동 입양 결연부가 설립한 참생명학교의 활동을 역시 최근의 우리나라 교회 생명운동에 포함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92년 형법 개정안 제135조(낙태허용범위)가 입법 예고됨에 따라 벌어진「낙태반대 1백만 서명운동」이 생명운동에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꽃동네가 오래 전부터 생명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있고「성가정입양원」 「자모원」「춘천 마리아의 집」「생명문화연구소」「생명수호대학생회」 「가정성화사도직」 등의 생명수호운동 단체들이 생겨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 몇몇 교구는 본당 평협에 가정 분고를 신설하고 있고, 교구장 사목 교서를 가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1995년 춘계 주교회의가「생명의 날」을 제정한 것은 참으로 뜻 깊고 반가운 일이며 이를 계기로 교회의 생명운동이 성직자, 수도자, 신자 모두가 동참하는 새 장을 맞이하게 되길 기대한다.
▣맺는 말
교회의 생명운동은 더 이상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인간생명에 대한 존중 없이 도덕성 회복, 경제성장, 남북통일을 부르짖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생명운동의 주인이라는 의식이다. 의료인은 의료인으로서, 입법자는 입법자로서, 교육인은 교육인 으로서 생명의 의미를 깨닫고 존중하며 보호하는 소명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악은 역동적이다. 작은 악을 허용하면 점점 더 큰 악을 허용하게 마련이다. 이미 구라파는 낙태 문제가 안락사 문제로 전이되고 있다. 1990년 네덜란드에서는 본인의 원의에 따라 안락사 된 사람이 5천4백 명이었고, 본인의 원의와 관계없이 안락 살해된 노인은 5천9백 명이었다. 태어날 아기들이 태어난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낙태 살해되었듯이, 장차는 노인들이 젊은이들의 필요에 따라 안락 살해될 운명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제 생명운동은 바로 우리 각자의 생명운동, 신앙운동 그리고 복음화 운동으로써 재인식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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