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 초기 발전과정에서 여교우들은 매우 특징적인 역할로 교회 성장의 밑거름을 형성했다. 1백3위 성인중 47위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입증해주듯 하느님을 위한 동정의 삶을 선택하거나 공동체를 형성, 신앙 안에 자주적인 판단으로 적극적 신앙생활을 실천했다. 반상의 개념이 엄격했던 폐쇄적 봉건사회 안에서 귀천을 초월한 이웃사랑으로 하느님 나라 건설에 앞장섰던 초기 한국교회 여성들은 또한 남자와 동등한 자유로운 인격체로서 여성의 존재를 인증시킨 해방적인 인물들이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이면서 또한 여성대회 반포 20주년을 점검하는 제4차 세계 여성대회가 북경에서 열리는 달이기도 하다. 본지는 세계 여성대회 개최 순교자 성월과 관련 한국 초기교회 여성들의 뛰어난 활약상을 강완숙, 이순이, 윤점혜, 정정혜 등 선조들을 통해 조명해 본다.
◆평신도 대모 강완숙
최초의 명도회 여성회장, 주문모 신부 보필하며 적극 전교, 여성단체 조직, 동정녀 과녀(寡女) 대상 교육활동, 여공동체 형성 교리ㆍ전교활동 지도.
조선 중기 영ㆍ정조시대(1761~1801)에 활동했던 강완숙(골롬바)은 한국 교회사 안에 큰 족적을 남긴 초기 여성신자들의 대모라고 할 수 있다.
엄격한 남녀구별이 존재했고 여성들은 모든 면에서 행동의 제약을 받아야 했던 당시, 강왕숙은 교회안이기는 했지만 가정을 벗어나 사회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혔고 남성들도 추종할 수 없었던 부분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개척적인 여성상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한국 여성사에서도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생애
강완숙은 충청도 내포지방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말재주가 있고 용감하였으며 생각과 취미가 고상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수도자가 되려는 생각으로 한때 덕행을 실천키 위해 불교에 귀의할 뜻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강완숙은 법공(法供)과의 인연을 끊고 덕산에 사는 홍지영의 후처로 결혼을 하였다.
남편의 성향과 맞지 않아 심적 어려움을 겪었던 강완숙은 충청도에 천주교가 들어오자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는 종교의 이름이 바르니 교의(敎義)도 바를 것』이라는 생각으로 서학책을 구하여 읽고 관심을 보였다고 황사영백서 등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는 매사에 열정적이고 자제력이 뛰어났으며 총명하고 부지런한 성품이었다. 가까운 친척들을 교화시키고 이웃 마을에까지 전교를 다닐 정도였다.
1791년 그는 신해년 박해가 일어나 고향이 소란해지자 전처의 한 아들 홍필수와 시어머니를 데리고 상경했다. 그때부터 윤유일 등과 주문모 신부 영입문제를 논의하는 등 교회내 대소사에 앞장섰다. 1794년 9월 주문모 신부를 본가에 모셔온 후 주신부로 부터 직접 세례를 받고 골롬바라는 영세명을 받았다. 6년 동안 주신부를 집안에 숨기면서 전교활동을 도왔던 그는 1801년 5월 신유교난이 발발, 가족들과 함께 체포 됐다. 그리고 당월 23일 최인철 등과 함께서 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그때 나이 41세.
◆활동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는 강완숙의 활동을 가리켜 이전의 교우가 4천명에 불과하던 것이 후기에 1만명으로 불어났는데 이같은 발전의 공로는 모두 강완숙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강완숙이 교회 내에서 펼쳤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요약하면 명도회 여회장으로서의 다양한 선교 활동과 동정녀들과 과부들의 공동체를 형성, 교육을 실시한 최초의 지도자라는 점이다.
강완숙 골롬바는 여회장 활동을 하면서 남인 양반들, 중인들로 구성된 남자 신도들과 더불어 다양한 선교활동을 펼쳤고 그의 집은 교회 내 제반행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뛰어난 언변과 상식 지식으로 양반가의 부녀들을 교회로 인도했고 왕가의 부녀들과 궁내의 나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했다. 더불어 의지할곳 없는 불행한 여자들을 거두어 그의 집에 살면서 교리를 배우게 하는 등 인간애를 보여주었다. 이 같은 활동들은 상하계급적인 구별 없이 포교에 힘썼던 그의 평등의식과 사상을 엿보게 해주는 것이다.
양반가의 부녀자들을 입교시켜 형성한 동정녀나 과부들의 공동체는 또한 한국 종교사상 수도회적 성격을 띤 첫 조직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강완숙의 활동중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주문모 신부 영입을 돕는 한편 자신의 집에 숨기고 보호하면서 초창기 한국교회 확장에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다. 주신부가 입국 후 포졸들에게 쫓기고 있을 때 강완숙은 한국교회에 성직자 영입이 중대사안이라는 점을 인식, 6년 동안 자신의 집에 숨기는 용기를 보였다.
그것은 성직자를 집에 은닉시킨 위험부담과 함께 외국인이면서 외간남자를 집안에 숨겨준, 유교사회 인습 하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동 감행이었다. 결국 주신부는 6년여를 그의 집에 기거하면서 교회를 확장시킬 수 있었고 강완숙은 더불어 한국교회의 토대를 넓혀 나가는 게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순교와 업적
신유년 교난으로 체포됐던 강완숙은 주신부의 거처를 알아내기 위해 자행된 온갖 악형들을 참아냈고 오히려 천주교 교리를 해설하는 등 크나큰 용기를 보여 주었다. 옥중에서도 교우들을 위로 격려하며 힘을 주었던 그는 투옥도중 주신부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의 옷자락을 찢어 주신부의 사도적 행정을 기록하기도 했다.
강완숙의 열정적 활동이 가지는 의미는 당시 여성의 한계성을 극복하면서 활동무대를 자유롭게 행동했던 선구자적 여성이었다는데 있다. 그리고 그 바탕은 바로 천주교였다. 많은 역사가들이 평가를 내리고 있듯 신유년 박해이전 한국천주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큰 원동력을 제공했던 강완숙 골롬바. 그의 적극적이고 자주적인 활동은 이 시대를 사는 여성신자들과 교회구성원들에게 크리스천으로서의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