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복음전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제주도에 천주교가 전래된 경위와 대표적인 박해사건인 신축교난(辛丑敎亂)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제주도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것은 4단계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일본 오사카에서 유럽 사신들을 만나 교리책과 기도서 등을 갖고 들어온 김복수에 의해서이고, 둘째단계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제주도에 귀양 와서 순교한 정조임금의 외삼촌 홍낙임과 역시 이때 귀양 와서 1838년 순교한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마리아)에 의해서다.
다음은 제주도 천주교 전래사와 관련된 홍낙임 및 이규석 3부자(父子)의 순교 사실과 그들의 묘소에 관한 마백락(영남교회사 연구위원)씨의 글이다. 마씨는 지난 7월 제주도를 방문, 이들의 순교지와 묘소를 새로 확인하고 돌아왔다. 이규석 부자의 묘는 신축교난 당시 순교자들 중 유일한 유명(有名)묘소로 알려져 있다. 이 글을 계기로 성지로 개발 보존하려는 관심과 노력이 증대되길 기대해 본다.
셋째단계는 1856년 펠릭스 베드로에 의해서 이다. 그는 홍콩에서 유학중이던 조선인 신학생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후 1858년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는 가족 20여명과 뱃사공 등을 입교시켰으나, 제주도의 신자집단은 병인박해(1866년)중에 전멸한 것 같다.
넷째단계는 1898년 양베드로가 육지에서 세례를 받은 다음 1899년 고향에서 전교함으로써 복음의 씨가 착실히 뿌리내리고 자라났다.
1899년 말 페이네 신부와 김원영 아우구스띠노 신부가 제주도에 부임해 포교활동과 성사 집행을 하였다. 1901년 봄까지 신자수 2백42명에 예비신자는 7백여 명이나 되었다. 제주읍과 한논에는 성당이 설립되고 2개 고소가 설립되었다.
신축년교난
바로 그해 신축교난이 일어나 외교인들과 신자들의 충돌로 신자 7백여 명, 외교인 2백여 명이 순교하는 큰 박해가 일어났다. 박해의 원인은 봉건사회의 말기에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항거하는 민중의 외침이 엉뚱하게 천주교 신자들과의 충돌로 발전된데 있다.
그리고 한반도 지배를 위해 불란서 선교사들을 축출하려는 과정에서 일본이 비밀 상무사를 결성하도록 도와 교회를 박해했다.
아울러 신부의 특권을 이용하려는 일부 신자들의 태도가 도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토착민들의 문화를 무시하고 교회가 사들인 땅에 있는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을 마구 쓸러버림으로써 토착민들과의 엄청난 갈등을 빚었다.
필자는 지난 7월 제주도에 가서 1801년 신유박해 때 귀양가서 약을 받은 홍낙임의 순교지와 정난주의 묘, 영세준비를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를 만나 귀양간 추사 김정희의 배소와 신축교난 순교자들이 묻힌 황사평과 대정현의 순교자 이규석과 2명의 자녀 무덤을 모슬포본당 신자들의 안내로 새로 확인했다.
이 가운데 아직 알려지지 않은 홍낙임과 이규석 3부자의 순교사실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순교자 홍낙임
그는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정조임금의 외조부인 풍산홍씨(豊山洪氏) 영의정 홍봉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1769년 정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 되었으며 정언, 문학, 사서를 거쳐 승지의 벼슬에 올랐다.
그가 언제부터 천주교를 믿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윤행림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권상현과 윤지충의 제사문제로 일어난 1791년 신해박해때 그가 천주교를 믿었다는 풍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 후 1800년 정조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01년 신유박해 때 영의정 심환지 등의 상소로 사학의 괴수라 하여 그해 1801년 4월 제주도로 유배되어 다음 달인 5월 29일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순교했다.
그와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던 은언군인(恩彦君絪)의 부인 신마리아, 또 자부인 송마리아가 강완숙(골롬바)의 권고로 천주교를 믿고, 또 한 주문모 신부를 폐궁에 잠시 피신시켰던 것이 발각되어 그도 같은 날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았다. 홍낙임이 신자가 아니라 억울하게 신자로 몰려 반대파의 탄핵으로 희생되었다는 말도 있으나 1791년 신해박해 때 그의 형제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풍설이 있다는 혜경궁 홍씨(그의 누님) 읍혈록과 현재 서울교구 대방도본당 신자인 홍석심(베드로)씨가 『저의 7대조인 홍낙임께서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제주도로 귀양가서 사약을 받았다』는 사실이 문중에서 전해오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천주교 신자였음이 확실하다. 그가 순교한 후 그의 시신을 정조의 어머니이며 그의 누님인 혜경궁 홍씨의 주선으로 제주도에서 경기도 고양군 벽제읍 문봉산에 있는 문중(問中)산에 묻었다.
이규석과 두 아들
순교한 이규석(본명 미상)은 고부 이씨 12대 손으로 1845년 이수형의 아들로 제주도 대정현에서 태어났다. 큰 부자였던 이규석은 물려받은 재산을 자선사업을 위해서 희사했다. 그의 집안이 언제부터 천주교를 믿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899년 파리외방전교회 빼이네 배신부와 김원영 아우구스띠 노신부가 제주도에서 전교할 때부터 열심한 신자들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즉 당시 대정현의 천주교회당으로 중문 색달리(서귀포시 여재동)에 공소를 차리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01년 신축교난이 일어나자 당시 먼 친척이며 대정현의 관노비였던 교난의 선봉장인 이재수가 1901년 4월 15일에 『이풍헌 천주교를 믿겠느냐. 안 믿겠다면 살려주겠다』고 하자『난 죽어도 좋다. 천주교를 믿는다』고 해 그의 목을 쳤다. 그러자 그의 아들들이 달려들어 말렸으나 이재수는 큰 아들이 기문과 셋째 아들 이기만, 넷째아들 이기생도 차례로 목을 쳐서 순교 시켰다.
그런데 큰 아들 이기만은 크게 다쳐 죽은 듯 했으나 다시 살아나서 밤중에 처가가 있는 중문으로 가서 치료를 해 살아났다.
현재 세분의 순교자 묘소는 모슬포읍에서 동남쪽 7백 미터 지점에 있는 동글 동산 옆의 밭뚝에 묻혀있다. 그가 처형된 장소는 모슬포 읍내 북쪽에 있는 노른 고지 동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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