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교구 사할린방문단의 일원으로 8월 9~16일 7박 8일간의 일정으로 사할린을 방문하는 한편 북한 중국 러시아 선교의 전진기지 블라디보스토크를 둘러봤다. 이번 방문은 한국교회의 극동선교의 당위성을 실감하는 좋은 계기가 됐다. 이에 개방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사할린 활성화의 주역 사할린 한인 동포들의 실상과 극동, 선교의 전진기지 블라디보스토크의 현황을 2회에 걸쳐 소개해 러시아 및 중국 북한 선교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개혁과 개방의 여파로 꿈틀거리고 있는 거대한 공룡 러시아, 그러나 사할린에 첫발을 내디딘 사할린 방문단 일행은 러시아 개혁과 개방 정책으로 인한 활발한 움직임보다는 미래에 내던져진 무한한 잠재력을 피부로 느껴야만 했다.
덜컹거리는 활주로를 미끄러져 비행기가 무사히 안착, 안도의 숨을 돌리고 트랩을 내린 순간 눈앞에 비친 붉은 페인트칠한 공항소방서의 모습은 1950년대 한국을 연상케 해 우주선을 발사하는 세계 두 번째 군사대국 러시아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도시로 접어들면서 눈에 띄는 빛바랜 콘크리트의 회색빛 건물들과 인적을 느낄 수 없는 적막한 도시 사할린은 죽은 듯이 살아있는 거대한 공룡을 바라보는 듯했다.
근교를 지나 시내로 접어들자 맥주를 사기위해 줄을 서 있는 알콜중독자들의 행렬은 눈에 띄었으나 예전의 빵을 사기위해 줄선 사람들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개혁과 개방으로 빵문제는 해결됐을지언정 의욕을 상실한 희미한 눈빛의 사람들 모습에서 몰락하는 러시아의 오늘을 감지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하나같이 과거 공산정부하에서 당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살았던 예전이 더 풍요롭고 살기 좋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통제력을 잃은 주민들은 명령체계를 상실한 군인들처럼 방황하고 있으며 사회전체가 의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주민의 40% 이상이 알콜중독자라는 사실이 잘 증명해준다.
옛 공산당의 자리를 정치ㆍ경제ㆍ물리적 마피아가 차지하고 있어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 빠져 있는 러시아. 차량을 분실했을 때 경찰에 신고하면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지만 마피아에 청탁하면 일주일 이내에 집으로 차량이 인도되고 있는 현실은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대륙 그 자체였다.
오호츠크해 서안에 있는 사할린의 면적은 7만8천 평방킬로미터며 인구 65만 명으로 6만여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 6만여 명의 한인들 중 4만여 명이 주도인 유지노사할린스크에 살고 있다.
인구 17만의 사할린의 주도(州度) 유지노사할린스크는 그러나 결코 낯설지 않고 오랫동안 잊었다 찾은 고향처럼 느껴졌다. 러시아말 중 유일하게 구사할 수 있는 단어가 「쓰파씨바」(감사합니다) 한마디뿐이라 더욱 낯설기도 하지만 검은 머리에 황색피부를 한 사람이면 누구나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사할린 까레스키. 사할린 상권의 70%를 점하고 있는 이들 한인 동포들은 대부분 2차 대전 당시 강제징용 온 한인 2,3,4세대들이다.
「눈 속에 움이 트고 눈 속에 싹트니 호통 치던 풍설대장 꼬리를 감추었소. 태양은 아름답게 비추니 왔구만 새봄은 왕생의 새봄이. 아 행복에 넘친 사할린의 봄. 어장의 고기철 농촌의 농사 때 방방곡곡 간 데마다 노래는 흥겨워 갈매기 뻐꾹새도 장단 맞추어 왔구만 새봄은 왕생의 새봄이. 아 행복에 넘친 사할린의 봄」
1949년경 만들어진「사할린의 봄」이라는 이 노래에는 눈보라 휘날리는 설움과 냉대의 땅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눈물을 삼키며 망향의 한을 달래던 한인 동포들의 애타는 그리움이 짙게 배여 있다.
살을 에는 추위와 배고픔의 동토 사할린을 어머니의 품처럼 풍요로운 고향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노래는 오매불망 그리던 고국 땅에 대한 질긴 향수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할린의 봄이란 노랫말처럼 온갖 역경을 딛고 당당히 일어선 사할린 동포들은 개방의 봄을 맞아 사할린의 경제에 활력을 제공하고 있는 주역들로 탈바꿈했으며 타민족의 부러움과 질시를 사고 있는 일등 민족으로서 한 민족의 자긍심을 심고 있었다.
쓰라린 망국의 눈물이 얼어붙어 있는 망향의 땅 사할린에서 무국적자들로 분류돼 냉대를 받았던 한인들은 광복 50주년을 맞은 지금 현지 방송을 통해 하루 2시간씩 한국방송을 시청할 정도로 굳건히 뿌리내린 동토의 무궁화로 변해 있었다.
한인 동포들의 높은 교육열은 수많은 사할린 출신 한인들이 러시아 각지에서 법률 경제 과학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게 했으면 한인들 중에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또한 공민권이 없으면 대륙으로 유학할 수 없었던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은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해 대륙으로 유학을 보내는 등 교육에 남다른 열성을 쏟고 있다.
공산당이 붕괴되기 전에는 모든 교육이 무료라 공부만 잘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요즘은 연 2~3백만 루불(미화 약 6백 달러)이락는 어마어마한 교육비가 지출됨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남다른 열정과 정성을 쏟고 있다.
한인 교포들이 맨손으로 사할린에서 중산층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한인 특유의 근면성에 기인한다. 교포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정한 사회에서 부업으로 농사를 지어 그 수출을 시장에 내다 팔음으로써 가계의 부담을 덜고 타민족보다 여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한인들의 농사 방식도 1950년대 초반의 감자, 1960년대 토마토 오이 등 야채, 1970년대 이후 고수익의 화훼로 점차 변모 됐으며 한인들의 1~2월 엄동설한 하우스 꽃 재배술은 유명하다. 러시아의 개방정책에 따라 사영업에 관한 법률이 88년 제정됨으로써 사설 시장인 바자가 크게 번성하고 있는데 한인들은 지역의 경제를 파고들어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다.
2차 대전의 말기에 접어들어 물자와 노동력이 부족했던 일제는 1942년 2월~44년 7월까지 관알선(官斡旋)이란 명목으로 한인들을 사할린으로 징집하기 시작했으며 1944년 9월 패색이 짙어지자 1939년부터 시행돼오던 국민징용령을 조선인에게도 적용 한인들을 사할린의 탄광과 토목공사장으로 강제 연행했다.
그 당시 사할린에 끌려온 한인들의 수는 대략 3~4만 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징용된 한인들 대부분은 고스란히 사할린에 남겨져 끈질긴 생명력을 증명이나 하듯 사할린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사할린 징용 한인들은 대부분 일본 이름과 러시아 이름 한국 이름 등 3개의 이름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는 사할린 까레스키들의 삶이 얼마나 어렵고 고달팠는가를 익히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20세 때인 1944년 강제징용 돼 러시아 공산당 의료기기 관리부국장을 역임한 올해 71세의 관희덕(이윤일 요한)씨의 인생은 사할린 강제징용 한인들의 애환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사할린 한인사회에서 출세한 엘리트계층에 속하는 요한 할아버지는 현재 18평 아파트에서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중풍을 앓아 뼈만 남은 요한 할아버지의 앙상한 모습은 50년 망향의 그리움만이 뼈에 붙어 있는 듯했다.
1남1녀를 둔 요한 할아버지는 6·25로 민족이 분단되자 고향산천을 잊기로 굳게 결심, 더 이상 후손들이 이산의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고 철저하게 러시아화 시켰다.
막내 동생 권희태(레문도ㆍ대구 경상고등학교장)씨의 방문을 받고 인부인사에 대답도 못하고 울부짖으며 주마등같은 50년의 세월을 회상,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요한 할아버지는 역사의 딜레마에 빠진 까레스키들의 애환과 아픔을 호소하는 듯했다.
한국과 러시아의 수교로 한인동포들의 고향방문이 훨씬 쉬워져 징용 1세들 자신이 고국의 품으로 돌아가더라도 자식들과 손자들은 러시아에 남아야 하기에 징용 1세들의 그리운 고국에로의 영구귀국은 또 다른 이산의 슬픔을 낳아 대부분의 한인들은 그리운 고국 땅으로의 영주귀국을 망설이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는 영주귀국을 포기하기도 한다.
설사 가족 모두가 귀국한다고 해도 낯설은 고국문화에 2~3세들이 얼만큼 잘 적응해 살아갈 것인지, 현재 사할린 중산층 이상의 생활수준을 고국 땅에서도 유지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 많은 한인동포들은 언 땅에서 향수만을 달래고 있다.
러시아가 개방됨으로써 한인 사회에도 수많은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핵가족화로 인한 가정의 파괴와 이혼의 증가, 그리고 청소년 범죄의 확산은 한인들의 골칫거리이다.
성의 개방과 20세를 전후한 조혼으로 이혼률이 나날이 상승하고 있으며 결혼한 부부의 절반가량이 이혼하고 있다. 이혼한 부모 혹은 할아버지나 할머니 손에서 자라나는 과정에서 비뚤게 성장한 많은 결손가정의 청소년들은 쉽게 마피아의 검은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한인 3~4세들은 겉모양은 한인이지만 사고는 완전히 러시아화 돼 세대 간의 격차를 겪고 있다. 고국에로의 귀환만을 바라보다 러시아어를 제대로 못 배워 겪은 어려움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고자 의도적으로 한국어 교육을 등한시했던 한인 1~2세들은 자식소자들과 사고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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