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마다 사상적, 종교적, 정치적 이유 등으로 교차점이 없는 양극의 길을 걷는 인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두갈래 평행선처럼 같은 시간대에서 다른 목표를 향해 질주했던 이러한 인물들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도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천주교 신앙의 수용을 기준 사회 질서와 문화의 도전으로 받아들였던 수구파 인물들과 복음을 전파하려는 호교론자들 사이의 사상적 대립과 문화적 갈등은 초기 한국교회사 많은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톨릭신문은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한 시대 두 갈래길」이란 제목으로 천주교 신앙 수용에 관련, 대립됐던 대표적인 인물들을 발굴, 연재한다.
성리학적 유교 중심의 가치 의식을 바탕으로 건국되고 사회질서가 체계화됐던 조선 전통사회에 이질적인 그리스도 신앙이 수용됨으로 천주교에 대한 국가적인 박해가 가해졌다.
천주교 출현은 신자들에 있어 「구원의 복음」이었지만 전통사회의 위정자나 지식인들에게는 사상적 변혁과 사회변화를 촉구하는 독소성과 정치성을 지닌 것으로 비춰졌다.
천주교에 대한 이러한 양극의 시간은 초기 신앙 수용 과정에서부터 드러나고 서학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신서학자(信西學者) 권철신(權哲身·1736~1801)과 척사론자(斥邪論者) 안정복(安鼎福·1712~1791)에 의해 극명하게 대립됐다.
성호우파(星湖右派)의 기수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과 성호좌파(星湖左派)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암브로시오)은 성호 이익(李翼)을 한 스승으로 모시고 둘다 남인 출신이고, 사돈지간이면서도 「천주교」에 대한 입장을 달리해 한 명은 신앙의 옹호자로, 다른 한 명은 척사론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대표적 인물로 갈라서고 만다.
권철신과 안정복의 인연은 권철신의 어린시절부터 시작된다. 아버지 권암(權巖)과 친분을 맺고 있던 안정복을 가까이서 모셨던 권철신은 후에 동생 권일신이 안정복의 딸과 혼인하면서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권철신과 안정복이 서학을 접한것도 이익의 영향이 많았다. 안정복은 1757년 처음으로 스승 이익과 서학에 관한 서한을 주고 받으며 자신이 「천주실의」(天主實義)와 「기인십편」(畸人十編) 등을 읽었음을 밝히고 있어 그 이전부터 이미 서학을 접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정복은 서한에서 「천주교는 이단의 학문」이라고 배척하고 있어 그의 척사론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고 있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안정복의 학풍 이면에는 전통적인 남인 출신 가문에서 태어나 다른 남인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때부터 당쟁에 희생, 벼슬길이 끊긴 불우한 집안에서 자란 피해의식과 그로 인해 성리학을 통해 조선사회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유교 이념을 되살리고자 했던 자신의 고뇌가 내재돼 있었다.
권철신의 신서학(信西學)사상은 1779년 겨울 천지암주어사 강학회를 주최하면서 신앙으로 발전했고, 권철신 자신은 1784년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했다.
이후 천주교 문제가 거론될 때면 언제나 권철신은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됐고, 정미년(1791년)의 「반회 사건」(泮會事件)이후 기호 남인 안에서 공서파(攻西派)와 신서파(信西派)의 대립이 노골화되면서 권철신과 더불어 이승훈, 정약용, 이가환이 서학의 3흉으로 지목됐다.
1785년(을사년) 천주교인 김범우 집에서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3형제와 이승훈, 이벽, 권일신 등이 모여 신앙 집회를 갖다가 우연히 발각돼 체포되는 「을사추조 적발사건」이 발발하자 안정복은 위기감 속에 서학을 직접 배척하기 위해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집필한다.
안정복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통해 천주학의 기본 교리인 인간창조론, 원조재조론(元祖再祖論), 영혼불멸론, 천당지옥론이나 수덕방법과 동신제(童身制), 제사문제 등에 관해 유학의 입장에서 격렬하게 논형하고 유학만이 정학(正學)임을 주장했다.
안정복은 「천학문답」에서 천주교는 현실을 문제삼지 않고, 오로지 후세의 천당지옥설을 믿어 사람으로 하여금 황당한 지경에 빠뜨리고 인간 자신과 세속사를 원수로 생각하여 결국은 부모군신(父母君臣)의 의(義)를 파멸시킨다고 비판했다.
안정복은 중국 역사상 농민 봉기가 종교적인 밀교결사(密敎結社)와 연락하였음을 사실로 예거하여 논증하고, 주자학 이외에 비정통적인 중국의 제학인 불(佛) 노(老) 묵가(墨家)사상과 양명학(陽明學)은 서학(西學)과 더불어 이단이며 사설(邪說)로 단정했다.
안정복의 척사론 배경에는 박해자들의 집권 지속 또는 정권 탈취의 야욕 달성을 위한 수단에서 빚어졌다. 안정복은 같은 남인 계열의 소장 학자들의 천주교 실천운동에 대해 두려움과 우려를 자아냈다.
이는 안정복이 1786년 당시 우상(右相)인 채제공(蔡濟恭)에게 서한을 보내 「남인소장 인물들의 서학운동이 당론에 악용되어 남인의 몰락을 초래하지 않을까 염려된다」고백한 그의 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안정복은 1784년 갑진년에 권철신에게 2천6백여자에 걸친 장문의 서한을 보내 「서학을 하는 무리가 모두 공의 친구가 아니면 제자들인데 어찌 이를 말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같이 좇아가고 있는가」하고 실책한 다음, 그로 인해서 자초할 패가망신을 경고했다.
그러나 권철신은 굴하지 않고 안정복에게 답신을 보내 「문의(文義)에 얽매어 실제로 얻은 바가 없어 큰 죄를 지었으니 스스로 생각하여 조석으로 허물을 막기에 겨를이 없다」면서 「죽기전 오직 침묵 속에서 자수(自修)하여 큰 악에 빠지지 않고 두려워하면서 세상을 마치는 법을 궁구하렵니다」라고 써보내 천주교를 계속 신봉할 것임을 밝혔다.
권철신은 이승훈의 북경영회가 창설되면서 그의 문도들을 대부분 교회 활동에 참여시키고 자신도 신앙생활에 증진했다.
이후 천주교 박해 때마다 신자들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거론된 것도 이에 연유한다.
권철신은 안정복이 죽은후 2년뒤 1801년 신유박해때 체포돼 4월 4일 매를 맞고 장독으로 옥사했다.
권철신과 안정복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학문의 폭을 넓히려는 의도에서 서학을 연구했다가 결국에는 생의 마지막까지 천주교 수용문제로 반대편에 서고 마는 두갈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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