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서는 기원전 1세기의 작품으로서 지혜문학에선 아주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지혜서를 성서로 인정하지 않으나 가톨릭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솔로몬으로 나와 있지만 솔로몬의 작품으로는 보지 않으며 오랫동안 내려오던 무명 저자의 것을 솔로몬의 이름을 따서 권위를 부여한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지혜 9,13~18)의 말씀은 누가 감히 하느님의 뜻을 생각이나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지혜란 인간의 상상이나 판단을 초월한다는 내용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어른의 생각과 아이의 생각은 다릅니다. 더구나 하느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아주 기묘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뛰어난 방법이요, 최고의 방법이었지만 그러나 인간의 눈에는 그것이 한없이 어리석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를테면 하느님이 인간이 된 것입니다. 도대체 주인이 종을 건지기 위해서 종 노릇까지 한다는 것은 일찍이 들어본 일도 없고 또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가장 어리석고 천대 받는 죄인의 십자가를 그분이 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습니다. 역겨우니까 안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지혜에 의존하고 있는 자들도 안 믿습니다. 너무도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죽음의 길인 줄 아셨으나 군중들은 그분이 나라를 세우러 가시는 길인 줄 착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본능적으로 소유의 욕망을 불태웠으며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보시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당신을 따라가기 위해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하셨으며 또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자기 포기의 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단 하루로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돈에 대한 끊임없는 욕심, 힘에 대한 야망, 겉잡을 수 없는 성질 불타오르는 성욕 그리고 흥청망청 놀면서 쓰고 싶은 사치와 낭비의 유혹 우리는 이런 것을 하루라도 버리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넘어지고 맙니다. 이처럼 자기를 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정말 묘합니다. 성서에도 저주받은 자의 것이라 나와 있는데도 그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면 십자가가 내 인생을 짊어져 주지않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도 훌륭한 지혜이지만 또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는 하느님의 오묘한 지혜를 터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래서 자신의 십자가를 구원의 은혜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자신의 병이 십자가라면 그 병을 은혜로 받아 들여야 하고 가난이 십자가라면 가난을 은혜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남편이 십자가라면 남편을 그렇게 받아 들여야 하고 자식이 십자가라면 또 자식을 은혜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하느님의 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주저하시고 괴로워하시던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면 그 짊어지지 않는 어리석음 때문에 인생이 고달프게 됩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포기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지옥입니다.
많은 이들이 십자가를 내던지기 위해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부흥회다 기도회다 쫓아다니면서 『할렐루야!』『아멘!』하고 열광하는 것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 타로 올라가겠다는 의지보다는 십자가를 내던지고 산에서 도망치겠다는 저의가 깊게 깔려 있습니다. 교회가 또 그런 식으로 신자들을 유도도 합니다. 예를 들면 자기 교회에 나오면 병 고친다는 얘기를 밥 먹듯이 합니다.
사람이 너무 똑똑하면 하느님의 지혜를 밑으로 내려보며 깔보게 됩니다. 신앙은 어리석은 자의 길입니다. 많은 순교자와 성인 성녀들이 그렇게 사셨고 성모님도 그렇게 사셨으며 지혜자체이신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따라서 참 지혜를 찾읍시다. 그것이 어리석게 보여도 거기에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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