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일 오후 1시 40분 비행기를 예약하고 대기실에서 2시간 가량 기다린 일행은 공항버스에 승차하라는 공항요원의 안내에 따라 버스에 승차, 항공기를 향해 몇 미터를 달렸을까 「공기 타이어 고장으로 출발이 지연됐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대기실로 돌아와 상황을 확인한 결과 저녁 7시나 돼야 운항 여부가 결정 난다는 그야말로 러시아식 대답에 황당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못 가지나 않을까 걱정이 스며들었다.
텅 빈 대기실에서 3시간 가까이 대기하다 오후 4시 26분 겨우 항공기가 운항하게 됐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곧 탑승했으나 수리가 마무리되기 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조급한 한국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한 묘한 기분까지 들기도 했다. 러시아에서의 일정은 방문객의 임의대로가 아닌 「러시아 마음대로」라 가만히 지켜볼 도리밖에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나라가 러시아인 듯 했다.
오후 4시 55분 사할린국제공항을 이륙, 러시아 대륙을 향해 1시간 30분을 비행해 내디딘 「블라디보스토크공항」은 사할린과는 격심한 차이를 보였다. 당장 눈에 띄는 공항 청사만 하더라도 반사유리로 깔끔하게 단장돼 있어 사할린 보다는 움직이기에 편리할 것이라는 안위를 추구하는 본심이 꿈틀거리기도 했다.
인구 50만여 명의 블라디보스토크는 「극동의 샌프란시스코」로 발전시키겠다는 후루시쵸프의 원대한 계획에 따라 무역항으로서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도시명 자체도 「동양을 지배하라」는 약간 섬뜩한 러시아의 극동정책을 함축하고 있다. 거리는 우리나라의 70년대를 연상케 했지만 시내를 활보하는 여성들의 세련된 옷 매무새는 명동의 멋쟁이들을 놀리는 듯했다. 스타디움 앞 대로 양측에 「키오스크」가 길게 늘어서 상가를 형성, 발 디딜 틈조차 없을 듯 번창한 모습은 방문단이 처음 피부로 느낀 개방된 러시아 그것이었다.
50마일 밖 북녘 땅이 희미하게 나마 눈에 들어오는 외항에 섰을 때 사뭇 감격스러웠다. 중국에 북한땅을 함께 접하고 있는 이 땅은 예전에 항일 투사들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만큼 오늘에는 한국교회의 동북방 선교의 요충지임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2백10년전 한국교회에 복음의 통로가 북쪽이었음과 같이 폐쇄된 북한의 복음의 손길도 압록강 이북에서부터 미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기자의 소견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중국선교에 이어 향후 북한까지 개방될 경우 북녘동포 복음화의 요충지로서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으로 느껴졌다. 목숨 걸고 복음을 이어온 순교자의 후손다운 새로운 용기와 도전이라는 1백3위 순교정신이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2명의 아우구스티노회 신부가 6개 본당 1천 마일을 관할 사목하고 있었다.
의욕에 비해 몸이 따라주지 못하는 듯 연로해 보이는 54세의 마이론 신부는 『관할구역을 한번 방문하기도 힘든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며 넌지시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천주의 성모성당」은 공산당 지배하에서 교회가 어떻게 생명력을 유지해왔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1935년 공산당이 접수해 1994년 반환되기 까지 교회는 굴욕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성모성당을 오르는 언덕 옆 전쟁박물관은 옛 루터 교성당으로 공산정부가 얼마나 철저히 종교를 말살하려고 애썼는지 익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1909년부터 1921년까지 13년간에 걸쳐 건립된 웅장한 고딕성당을 교회는 제대로 한번 사용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공산당에게 빼앗겨야만 했다. 건물을 접수한 공산당은 이 건물을 공공 사무실로 사용코자 단층 성당 3층으로 개조, 여러 개의 방으로 완전히 망쳐놓았다.
마이론 신부는 성모성당의 옛 부지를 다 반환 받지 못하고 성당만 돌려받았다며 추후 부지 전체를 되 돌려받을 계획이라면서 방문단에게도 인적, 물적, 영적 지원으로 힘이 되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내부 슬라브를 완전히 허물고 원형복원공사를 한창 진행 중이라는 마이론 신부는 성당의 복원보다 무신론에 젖다 못해 완전히 붉게 물든 러시아인들의 정신세계의 회복이 급선무라고 선교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마이론 신부에 의하면 러시아 복음화의 첩경은 어린이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키우는 것이 라고 한다. 공산주의 교육을 받는 청년층 이상의 러시아인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까 지의 시간보다 어린이들이 하느님을 배워 성인이 되기 까 지의 시간이 훨씬 짧다고 역설했다.
천주의 성모성당 측은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성서를 비롯 수많은 종교서적을 구비해 놓고는 있으나 인적 재원의 부족으로 성당 한 켠의 창고에 쌓아두고 있는 실정이라고. 4년 전에는 미국의 한 수녀회에서 선교를 위해 잠시 파견되기도 했으나 기대만큼의 성과가 없어 이내 철수해버려 고전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동사목의 경험이 전혀 없는 이들 미국선교사들은 TV, 비디오 상영 등 원시적인(?) 아동사목에 머물고 있어 마이론 신부는 염치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동행한 예수성심시녀회 수녀님들을 붙잡고 선교사의 파견을 애원하다시피 했다.
러시아에서 아동사목의 중요성은 공산주의 무신론 교육이라는 이데올로기 측면 외에 사회 문화적인 이유가 있다. 20세를 전후한 조혼으로 결혼한 부부의 절반 가량이 이혼함으로써 할머니 할아버지가 반고아가 되다시피 한 손자손녀를 돌보는 경우가 허다해 이들 노인들의 사후에는 고아원 등 복지사업은 필요 불가결한 상황이다. 이외에는 의료, 빈민식당 등 제반 복지활동이 요청되고 있다.
정교회와 가톨릭교회와의 차이점을 설명한 선교 소책자를 직접 제작해 배부하는 등 각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마이론 신부. 기자의 눈에는 성모성당 그 마저도 노신부에게는 너무 벅차게 느껴졌다.
러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봉사할 용기 있는 지원자가 나서지 않는 한 마이론 신부와 같은 외로운 교회의 파수꾼들이 미풍만 불어도 꺼질듯한 가냘픈 선교의 불씨를 이어갈 수 밖에 없을 것이리라.
어떻게 보면 러시아 대륙은 한국교회의 순교정신을 갈구하고 있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해 부러워하는 한국교회 이 높은 성소지망률은 동북아 선교를 위한 하느님의 섭리는 아닐까?
선교사 파견을 갈구하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세계 유일의 개방되지 않은 북녘 땅의 복음화를 지향하며 끝없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북한 선교의 거점으로 미리 발판을 다져놓는 것도 유익하리라. 이는 나날이 성장. 발전하는 한국교회의 패기와 용기만으로서 가능하리라.
시야를 넓혀 민족은 물론 세계 복음화에 앞장서려는 젊은 성소 자들의 자원과 선교 지에 뼈를 묻으려는 굳은 결단과 용기가 한국교회에 주어진 소명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푸니쿨로」(독수리)언덕에서 내려다본 「블라디보스토크」. 개방의 여파로 동양의 샌프란시스코를 꿈꾸고도 있었지만 극동선교의 요충지로서 한국교회의 영적 물적 지원을 호소하듯 남으로 남으로만 시야를 향하고 있었다.
현재 대구대교구에서는 사할린에 2명 카자흐스탄에 1명 등 3명의 선교사제를 파견, 러시아 선교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한인 동포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들 3명의 선교사제들은 러시아 대륙의 복음화라는 소명 실현을 위해 춥고도 외로운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는 것이다.
선조들이 스스로 교리를 깨닫고 복음을 찾아 나섰음 과 같이 이제 우리에게는 「복음이 필요한 땅을 찾아 나서라. 그리고 복음의 씨앗이 뿌리내리도록 하라」는 소명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방선교에 도움을 주실 분은 이강언 신부(053)554-6262에게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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