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헌종5년) 기해박해(己亥迫害)를 전후한 조선후기 사회는 조선 정치사뿐만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사에 매우 중요한 역사성을 지닌 시기이다.
이 시기의 조선 사회는 정치적으로 시파(時派)가 내몰리고 노론(老論) 벽파(僻派)가 정권을 창탈하는 시기였고, 한국 천주교 회사로 보면 교회가 획기적인 발전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 시기에 조선교구 설정과 함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쳐, 김대건ㆍ최양업 신부 등 한국인 신부를 탄생시키고, 신자 수가 1만여명에 달할 만큼 교세를 급속히 신장시켰던 시기였다.
정치적, 교회사적 변혁기인이 시기를 이끈 조정의 수장과 한국 천주교회의 최고 지도자는「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와 조선 2대 교구장「앵베르 범 주교」였다.
이 둘은 당시 조선 왕조와 조선 천주교회의 교권의 최고 수장으로서「정권 수호」와「신앙 수호」라는 서로 다른 목적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맞수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순조 임금의 비(妃)로 익종의 어머니이며, 안동 김씨 영안부원군 조순(祖淳)의 딸인 순원왕후(1789~1857)는 헌종과 철종을 수렴청정 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발판을 구축한 여장부다.
순원왕후는 1834년 11월 남편 순조가 승하하자 당시 8살밖에 안된 그의 손자인 헌종(憲宗)을 왕위에 올려놓고 대왕 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했다.
이때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으로 순원왕후의 오라비 황산 김유근이 판서로서 대비의 정사를 보필하게 되자 조선 천주교회는 서양 선교사를 입국시켜 앵베르 범주교를 중심으로 교회 재건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조선 천주교회의 중흥은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이 헌종의 부친인 효명세자(孝明世子) 익종(翼宗)의 비로 간택되고, 1827년 익종이 대리 청정을 하게 되어 노론 벽과 세력이 강화되면서 점차 변하게 된다.
그러던 중 얼마 안돼 익종이 죽고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정권이 넘어가자 다시 수렴청정을 하게된 순원왕후는 이지연과 손을 잡게 된다. 여기서 한국 천주교회의 양대 박해라 일컫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의 가해자인 순원왕후와 흥선대원군의 공통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순원왕후와 대원군. 이들 둘은 공통적으로 정권 유지를 위해 처음에는 천주교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다가「천주교회」가 정치적 대상이 아님을 간파하고 여지없이 혹독한 박해를 가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정치정권에서의「천주교」인식은 오직 정권과 관련해 이해됐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조선 정치 현실에 대해 앵베르 주교는 박해기 여느 서양 선교사들의 한국 정치관과 마찬가지로 조선 양반을 이 세상에서 가장 방만하고 가장 무서운 폭군으로, 조선 관리들을 가난하고 병약한 국민의 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로 간주 하였다.
순원왕후는 1839년 헌종 5년 3월 5일 이지연이 정적(政敵) 시파(時派)를 몰아내기 위해「천주교인들은 흉악한 백련교나 그 교파의 잔재로 이 불충한 파당을 뿌리뽑기 위해서 법을 엄하게 적용시켜줄 것」을 상소하자 기해박해를 일으켰다.
순원왕후는「가택수색 제도」를 창설 천주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첫「오가작통법」을 실시하고, 특별 중신회의를 개최「대신들과 포장들에게 신자들의 씨를 말리는데 소홀하였음」을 책망하고, 「대신들이 직무 수행에 더 열의를 보이지 않으면 지극히 엄중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사학토지령」(邪學土地令)을 내렸다.
이에 박해는 경상도까지 확대돼 한국 천주교회는 현석문, 정하상, 조신철, 유진길과 같은 교회 지도자를 모두 잃고 만다.
1837년 12월 주교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앵베르 범 주교는 교회 조직을 정비하고 조선인 성직자 양성에 혼신을 다했다.
앵베르 범 주교는 정하상과 유진길 등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왕복 5천리길이 되는 북경길을 아홉차례나 오가며 교황에게 청원서를 올려 20여년만에 영입해 온 선교사였다.
앵베르 주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지거를 신학생으로 선발, 마카오로 유학보내고 정하상 이신규 등에게 신부 양성 수업을 실시, 국내에서 한국인 사제를 조기에 양성하려 계획했으나 기해박해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이때쯤 순원왕후는 배교자 김순성의 밀고로 조선에 앵베르 범 주교와 모방, 샤스땅 신부 등 서양인 선교 선교사가 잠입,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음을 듣고, 분개하면서 즉각 이들을 체포해 처형할 것을 명하고「오가작통법」을 전국적으로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이어 순원왕후는 양인의 선교 활동을 조선역대 임금들의 교서와 국시에 어긋난 것임을 중시여겨「잡초는 베어낼 뿐 아니라 뿌리채 뽑아야 한다」면서「천주교인들의 씨를 말릴 것」을 교시했다.
서양 선교사의 입국은「불씨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박해를 가속화 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기해박해 포고령이 내리자 상게 마을로 피신해 있던 앵베르 범주교는 더이상 자신으로 인해 신자들이 박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1829년 8월 10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날 자수,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앵베르 범주교의 체포소식을 들은 순원왕후는「범주교를 포청에서 고문하고 빨리 포교를 남도에 보내어 모방 나신부와 샤스땅 정신부를 체포하라」고 지시하는 한편「범주교를 밀고한 김순성에게 오위장(五衛將)을, 그를 체포한 포교 손계창에게는 변장(邊將)을 각각 수여할 것」을 허락했다.
앵베르 범주교는 모방, 샤스땅 신부가 자수해오자 다시 이들과 함께 의금부로 가서 신문을 받고 음력 8월 14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이에 앵베르 범주교는 조선에 입국한 첫 주교이며, 모방ㆍ샤스땅 신부와 함께 조선에서 순교한 첫 서양 선교사로 한국 천주교회사에 기록됐다.
순원왕후는 앵베르 범부교가 처형되자 사학을 배격하는「척사윤음」(斥邪倫音)을 내각에게 지어 바치도록 명해, 검교제학 조인영이 이를 지어 바쳤다.
헌종실록 즉위 5년 9월 18일자 기록에 보면 헌종은「척사윤음」에서「몰래 두 세번씩이나 양인(洋人)을 불러들인 소문이 중국 땅까지 펴지고 한 무리가 되어 두루 통하는 바가 신유년과 비교했을 때 휠씬 심해 대왕대비의 명령을 받들어서 감히 천벌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순원왕후의 기해박해로 훗날 70명의 기해박해 순교 성인이 한국 천주교회에 탄생되지만 당시 한국 교회는 주교와 신부, 교회 평신도 지도자 모두들 잃음으로써 이전 보다 더 가난한 서민층에 복음을 전파하게 되고 깊은 산중에서 교우촌을 형성, 신앙 생활을 유지하게 된다.
가문의 세도정치를 유지하려는 순원왕후의 조선에 입국한 첫 주교로 한국인 사제를 양성, 한국 천주교회를 재정비하려던 앵베르 범주교는 기해박해를 계기로 정권과 교권의 수장으로서 한국 교회사안에서 영원한 맞수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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