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천주학(天主學)을 하느냐?』『과연 하나이다』『누구에게 배웠는가?』『어려서 모친에게 배웠나이다』『천주는 배반 못 하나이다』『네 오라비는 죽으려고 결심하였다. 너는 한 말만 하고 어미를 데리고 나가서 살아라』『나가 살려고 하면 천주를 배반(背反)해야 할것이니 그렇게는 못하나이다』
1839년 11월 24일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참수를 당한 정정혜(엘리사벳)은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유년에 순교한 정약종(아우구스띠노)의 딸이며 정하상(바오로)의 누이이다. 정정혜는 그의 부모 오빠들과 함께 신앙을 증거하다 목이 베임으로써 한국교회 사상 대표적인 가족 순교자의 사례를 남긴다.
동정녀이며 순교자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지니고 있는 정정혜. 그의 43년 생(生)은 하느님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올곧은 삶 그 자체였으며 위로는 성직자들을 정성을 다해 받들고 아래로는 회장들과 모든 신자들을 자신의 몸과 같이 대접하고 사랑한 인물이었다.
◆생애
정정혜는 1797년 정약종과 유소사의 딸로 태어났다. 4세때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 그러나 신유교난때 아버지 정약종이 순교하고 전가족이 체포되면서 젖먹이의 나이로 감옥생활을 경험. 모든 가산을 몰수 당하고 모친과 두 오빠와 함께 감옥에서 풀려 나온 정정혜는 마재의 삼촌 정약용 집으로 갔으나 친척들의 냉대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달레 신부가 한국교회사에서「역경이라는 학교에서 키워진 강인한 여인」이라고 칭했을만큼 정정혜는 가난 추위 굶주림으로 어렸을때부터 어려운 생활을 경험해야 했다.
그가운데서도 정정혜는 어머니로부터 천주교의 경문(經文)과 교리를 익혀 나갔다.
한편으로는 바느질과 길쌈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도왔다. 온갖 시련을 자신의 것으로 참아받아들이는 덕을 보였고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냈다. 그녀의 단정한 성품과 모범적 덕행은 가문을 망하게 한 장본인이라고 등을 돌렸던 친척들을 감화시켰고 천주교에 다시금 입교하는 예를 낳기도 했다.
큰언니가 12살의 나이로 죽고 오빠 정하상 바오로가 서울로 상경, 교회일을 돕고 나서자 그녀는 모친과 함께 더욱 영신적인 생활에 몰두하였고 동점을 결심했다. 정하상 바오로의 활약으로 모방 샤스땅 앵베르 등 불란서 신부들이 자신의 집에 머무는 동안 정정혜는 모든 정성을 다해 그들을 도왔다. 무식한 신자들을 위해서는 교리와 경문을 가르쳤고 가톨릭의 의식과 성사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그의 활동은 앵베르 범 주교가 여회장으로 소임을 임명하려고 했을만큼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것이었다.
정정혜는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1839년 모친 오빠와 함께 잡혀갔다.
배교를 강요하는 온갖 꾀임과 감언이설에도 꿋꿋한 모습을 보였던 그는 7회의 신문과 7회의 혹독한 고문을 견뎌냈고 3백20대의 곤장에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 마침내 그해 11월 24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정정혜는 43세의 나이로 참수를 당한다. 정하상 바오로는 그보다 넉달 앞서서, 모친 유세실리아는 두달 앞서 순교했다.
정정혜가 순교한 장소는 이미 부친 정약종과 두 오빠가 순교의 피를 뿌리고 간 장소였다.
◆아름다운 애덕심
정정혜의 교회활동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가난한 사람들 돕기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지도함은 물론 대부분 굶주림에 시달렸던 신자들을 보살피고 도와 주는데 힘을 다했다. 당시 신자들은 거의 몹시 가난함에 시달리고 있었고 연달아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했기 때문에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앵베르 범 주교가 여회장으로 점찍어 놓았던 것도 이러한 이웃들에 대한 마음 씀씀이 때문이었다. 여회장 임명은 기해박해가 터지면서 무산되고 만다.
정정혜의 애덕심은 감옥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혹형중에서도 안색하나 바뀌지 않고 염경묵상(念經默想)하는 모습은 함께 옥에 있는 신자들을 감동시켰다. 또한 집에 있을때 보다 더 전심전력을 다해 신자들의 의식(衣食)을 돌보았다.
신자들이 지치지 않도록 권면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재산을 들여다가 먹을것을 제공해 주었다. 형장으로 떠나면서 까지도 신자들에게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형장에 나가서도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청했고 죄수 수레를 타고서도 끊임없이 그 자신이 기구를 바쳤다.
기해박해가 일어났을때 자신은 『순교할 자신이 없다』고 겸손한 모습을 보였던 정정혜 엘리사벳.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제야 예수가 받으시던 형고의 만분의 일이나마 알게 하시니 달게 받을 것이다』고 오히려 기쁨을 보였던 그는 당당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죽음에 이르러서 까지 자신보다 이웃을 걱정했던 자랑스런 순교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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