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사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병인박해」(1866~1873)하면「흥선대원군 이하응」과「성 남종삼(요한)」을 떠올릴 것이다.
이들은 한국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세계 종교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잔혹했던 병인박해의 불씨를 제공한 이들이며, 민족사적으로 볼 때는 조선후기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들 때「쇄국」과「개방」의 갈림길에서 민족의 장래와 국운을 결정해야만 하는 당시 역사의 중심 인물들이다.
고종의 즉위로 조정의 실군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과 당시 승지(承旨)로 있던 남종삼은 둘다 조정의 세력가와 중신으로 이전 3대 60여년간의 세도 정치의 악순환으로 땅에 떨어진 왕권을 재정비하고 민생의 안정을 기하는 국가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들은 또한 외세로부터 어떤 정책으로 국가를 보위할 것이냐하는 새로운 정치적 숙제를 공통적으로 지고 있었다.
흥선 대원군과 남종삼의 관계를 교회사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주변 세계의 상황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흥선 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할 무렵인 고종 1년 1864년 당시 주변 환경은 시베리아를 차지한 러시아가 남하정책으로 함경도 경흥부에 와 조선조정에 통상을 요구해 왔고,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애로호 사건 등으로 이미 1869년 영불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 당하는 등 세계사의 근대적 조류가 은둔 왕국 조선에 밀어 닥치던 시기였다.
또 국내 정세로는 섭정인 조대비와 조두순, 김병학, 정원용 등 정계 주요 인물들이 숭유 보수세력으로 주류를 이루었고, 지방 유림이「척사 위정운동」의 압력세력으로 대원군을 괴롭혔다.
그래서 흥선 대원군과 남종삼은 그 유명한 「이이제이(以夷制夷)방아책(防俄策)」으로 이 난국을 해결해 나가려 했다.
대원군은 처음부터 천주교나 선교사들을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당시 12명이 선교사들이 국내에 숨어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가 천주교리를 배우고 또 왕의 유모가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는 것도 묵인하고 있었다.
특히 부대부인 민씨가 고종즉위를 기해「감사미사」를 청한 적도 있었다고 하니 그 자신이 처음부터 천주교에 대해 탄압적이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종 1년인 1864년 음력 2월, 러시아인들이 경흥부에 화서 서면으로 통상을 요구하자 먼저 대원군이 베르뇌 주교에게 협조를 요청해 왔다.
이때 베르뇌 주교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서로 국가와 종교가 다르므로 러시아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점과 ▲조선 정부가 서양의 어떤 나라와도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하고 있기에 이런 위험을 모면할 방도가 전혀 없다는 이유로 대원군의 요청을 거부했다.
이로써 조선 정부와 천주교의 양대 지도자의 첫만남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1865년 음력 9월 다시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하자 이번에는 남종삼과 베르뇌 주교의 복사 홍봉주가 주동이 돼「방아책」을 추진한다.
대원군과 남종삼의 접촉의 배후에는 부대부인 민씨의 지원이 컸다. 부대부인 민씨는 격동하는 정세의 변천 속에 나라를 구하고, 신앙의 자유도 얻는 호기를 놓치면 안된다는 조바심에서 고종의 유모인 박씨를 불러「러시아 남침을 막기 위한 대원군과 베르뇌 주교의 면담이 성사될 수 있는 청원서」를 올릴 것을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했다.
이에 남종삼은 대원군에게「조불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의 힘을 빌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에 체류하고 있는 프랑스선교사의 힘을 빌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요지의 청원서를 작성, 운현궁을 찾아가 직접 대원군에게 올렸다.
상소문을 받은 대원군은 다음날 남종삼을 은밀히 불러「주교가 러시아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하느냐」는 확답을 받고「주교에게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할 것」을 남종삼에게 명했다.
남종삼은 이 자리에서 대원군에게 세계 대세를 소상히 설명하고,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선 프랑스 영국 등과 동맹해야 하며, 또한 나라의 문호를 개방해 교역에 힘쓰고 선진문명을 섭취하여 국력을 키워야 함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마침 북방지역을 사목 방문하고 있어서 두번째의 만남도 실패하고 만다.
교회측으로부터 연락을 고대하던 대원군은 정치 세력권에서 천주교도와의 비밀접촉을 빌미로 자신을 정계에서 내몰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천주교를 탄압해 반대세력의 공세를 미연에 꺾어 버릴 것을 결심한다.
남종삼은 대원군과 베르뇌 주교의 면담이 실패로 돌아가자 무서운 박해가 닥쳐올 것을 직감하고 낙향해, 배론신학교에서 고해성사를 보고 순교를 결심한다.
대원군은 1866년 박해령을 하달하면서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과 남종삼을 체포할 것을 명하고, 이후 1873년까지 8년간 8천여명이 순교하는 대박해가 전개됐다.
남종삼은 1866년 3월 1일 금부도사에게 체포돼 서울로 압송, 의금부 옥에 투옥됐고, 여기서 5일간 추국당했다.
남종삼은 고문에도 『자신이 러시아의 침략을 염려한 것은 매국의 계획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는 점만 강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남종삼은 ▲국법으로 금하는 사학을 큰소리로 외쳐 대기를 꺼리지 않고 예사로 여긴 죄 ▲천주교를 정도라 주장 이를 금해서는 안된다고 한 죄 ▲말로는 군주와 부모를 위한다고 하나 도망다녀 군주를 거스르고 부모를 저버린 죄 ▲경흥에 나타난 러시아인의 문서가 접수되지도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을 터인데, 요사스러운 말을 함부로 퍼뜨려 감히 기회를 엿보아 나라를 팔고자 한 죄 ▲장경일, 홍봉주와 긴밀하게 짜고 주교가 간 곳을 알면서도 끝내 실토치 않은 죄 등 다섯가지 죄명으로 3월 7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집권 10년간에 있은 치적을 통하여 추찰할 수 있듯이 대원군은 마키아벨리즘적 정치 수완을 구사한 위정자였으며, 개성이 강직하고 과단 명쾌했으나 오만과 독종이라는 동양적 전제 지배자의 기반을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다.
대원군이 남종삼과 같이 세계사의 흐름을 내다볼 수 있었다면, 결코 천주교 박해를 야기치 않았을 것이다. 또한 양요를 자초하면서까지 쇄국 정책을 강화하여 세계사의 조류를 역행하고 후진국의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 쓰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동안 남종삼이 주도가 돼 교회와 박해 당국자와 최초의 접촉을 꾀한 점은 교회사의 일보 전진을 본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대원군과 남종삼의 관계는 교회사뿐 아니라 한국 근대사적 관점에서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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