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을 동원하여 거짓 증언을 시켰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대제관 가야파는 좀 다급해졌다. 아침회의에서 무엇인가 결말을 보지 않으면 오늘이 지나기 전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최종 결판을 보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예수를 거슬러 거짓증언을 할 때 대제관은 예수가 그 증언에 대한 반박이나 자기 변론을 하기를 바랬다. 그 말에서 무슨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까 해서 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대제관이 『이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는 소리가 저렇게 큰데도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라고 독촉했을 때도 예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침묵은 하느님의 종을 나타내는 특징이다(이사 53, 7). 박해받는 의인의 침묵에 관한 모범이 시편에도 나온다. 『나는 아예 귀머거리가 되어 듣지도 않았고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습니다 고소를 당하면서도 그 말이 들리지 않아 변명조차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만 기다립니다』(시편 38, 14~16) 침묵을 지킴으로 예수께서는 사태를 주도하고 있다. 말하자면 토론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잡아온 가야파가 아니라 잡혀온 예수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실 때에는 때가 왔다고 판단될 때이고 대답할 만한 질문이 던져졌을 때이고 대답이 필요할 때이다. 지금 그 때가 왔다. 가야파는 초조해졌다. 그리고 피고소인의 문초를 자기가 직접해야 할지 속으로 망설이다가 이윽고 순간적인 결심을 하였다. 가야파는 말을 조심해야 했다. 백성들처럼 허튼 소리를 했다가는 체면이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도 같은 처지에 있다. 대답한 마디가 운명을 바꿔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꼭 대답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기본 복음이다.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전교활동을 하시면서 자신을 가리켜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고 한번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밝힌 적이 없다. 이제 그것을 직접 밝힐 때가 왔다. 예수께서는 『그렇다』라고 해야 할 때는 『그렇다』라고 하고 『아니다』라고 해야 할때는 『아니다』라고 한다. 대제관 가야파는 단도직입적으로 예수의 정체에 대한 심문을 던졌다. 『네가 찬양 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이냐?』가야파는 예수를 걸어 말할때는 결과적으로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 발언을 한다.
예수를 잡으려고 모의할때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한사람이 죽는 것이 이익이라는(요한 11, 50)말을 할때에도 예수의 구세주라는 정체를 결과적으로 토로한셈이 됐다. 오늘도 대제관으로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다짐을 받으려고 한 발언이었다. 이 말을 하면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이름을 들어 맹세까지 하였다.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였다. 『그렇다 분명히 말하겠는데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은 것을 여러분은 보게 될 것이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해도 여러분은 믿지 않을 것이며 내가 물어 보아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전능하신분」은 하느님의 대명사이다. 「하늘의 구름」은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것을 유대아인들은 누구나 잘알고 있다(대목6 참조). 그 뿐 아니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시편 110장 1절과 다니엘서 7장 13절의 말씀이 자기를 두고 한 말씀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당신이 진정 하느님의 메시아라는 확언을 듣고 최고의회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외쳤다. 『네가 그러면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이냐?』그들은 재판을 자기들이 뜻하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고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중하게 대답하셨다. 『여러분이 말하는 군요. 그렇습니다』그들의 입을 통하여 예수가 메시아라는 언명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은 재판이 원고측과 피고측 양측이 다 자기 뜻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이스라엘 역사상 모세는 물론 아무 예언자도 자기를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자청한 사람은 없었다. 스스로 하느님이라고 외치는 예수는 그들에게 분명 신성모독 죄인이다. 가야파는 자기 옷을 찢으며 더 이상의 증언이 필요하냐고 회중의 동의를 구하였고 모두의 동의를 얻어 『이자는 사형이다』라고 선언하였다. 판관이 옷을 찢는 것은 애통과 비탄을 표시하는 전례적 행위이다. 그들은 예수를 다시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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