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환경운동의 역사는 불과 5년 정도밖에 되지않는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환경분제를 다루는 기관이 단 하나도 없었다. 80년초 김지하를 중심을 한살림, 한국공해 문제 연구소(사설)ㆍ공해 추방운동의 조짐이 있었지만 실천적 시민운동으로서 환경운동의 조짐이 있었지만 실천적 시민운동으로서 환경운동은 낙동강 페놀사건이 터지고 난 뒤부터이다. 이 시작도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시민들의 조건반사에서 튀어나온 문제중심에서 멀어지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정부로부터 시작된 운동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나섰다는 점이다(주민자치). 그러나 이 운동은 철학적 반성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동안 환경운동이 양적, 질적으로 발전은 했지만 지금의 환경운동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현실속에서 소외되고 있는 면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통일문제처럼 당위적인 측면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이론적 공감은 확산되고 있지만 구체적인 생활속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까지의 정부의 정책과정도 중앙정부의 표준모델을 해당 지역에 단순히 집행하는 것이 고작이다. 예를 들러 쓰레기 수수료 종량제의 전국적 획일화이다. 우리운동의 수준은 쓰레기 종량재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제는 사방에서 너도나도 떠드니까 오히려 냉소 내지는 무감각해져 버렸다. 세계 다국적 기업과 내통하는 국내 독점재벌기업들이 녹색탈을 뒤집어 쓰고 환경을 살리는 척하고 있는 것뿐인데 소비자들은 모든 상품을 소비하면서도 환경문제는 아주 지엽적인 실천으로 예컨대 저공해 비누 만들기, 우유팩 재생, 우리농산물 사먹기 등으로 보상하고 있다.
문제는 아주 다급하고 심각한데 좋은 예측만 하고 있다. 잘 되겠지, 괜찮겠지 막연한 낙관론으로 심각한 나쁜 예측들을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 천식환자가 늘어나고 밥은 농약으로 오염되고 밥 이전에 물을 마실 수 없고 물 이전에 숨을 쉴 수 없고 4대강은 공업수로 전락되고 산의 모든 기맥을 다 끊어 버렸는데 물없이 공기없이 살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는가. 도대체 호의호식하면서 서서히 죽어가는데도 무엇이 잘 살게 되었나하는 근본물음이 나온다. 역설적인 것은 사람들이 많이 소비할수록 더욱 공허하고, 갈수록 돈은 풍부해도 시간에 쫓기고, 역사상 유례없는 개인적 자유는 누리지만 공동체의 붕괴는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공해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지구촌의 문제이다. 전세계적인 자원고갈, 핵폐기물, 지구온난화, 오존층파괴, 유전공학의 무서운 힘, 인구증가, 소비의 무한확대와 제3세계의 사막화와 가난앞에 십계명과 그리스도교는 무력하다. 세계재산의 5분의 4는 선진국에서 차지하고 있는 반면에 제3세계의 가난과 후진성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환경문제만 하더라도 미국의 신생아 1명이 소비하는 에너지는 네팔의 신생아 9백명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서구에서 실천하는 환경운동은 빛좋은 개살구가 아닌가. 지난 2세기동안 서구의 유럽에서 이루어진 석유화학산업의 환경에 대한 공격은 전 세계로 확대되어 현재는 가장 악성 국면에 처해 있다. 이 공격에 대한 저항은 19세기에 시작되었는데 특히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과 더불어 환경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린피스, 지구의 날, 세계 환경의 날 등의 각가지 이벤트로 서양이 환경운동에 나서지만 WTO체제이후의 다국적 시장의 세계적 지배, 정보와 통신, 기술의 문화적 제국주의로 미루어 볼 때 과연 그 세계관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교회는 어떤가, 교회도 사회운동처럼 문제현장의 고발, 환경의 오염이나 파괴적 결과적 현상들에 관해 대응하거나, 일시적이거나 사회적 도전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은 본당 안에, 교구 안에 무슨 기구나 조직, 환경분과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교회안에 환경운동도 1990년 1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생태윤리에 관한 메시지에 의해서 특히 고무되었다고 볼 수 있고 정의평화위원회의 자료집의 도움도 컸다. 대구대교구의 푸른평화운동이 지역사회안에 시민운동으로서 뿌리를 크게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주목할만 하다.
제도안이든 제도밖이든 한국의 환경운동은 문제별 또는 사례별로 실증적인 조사나 연구, 고발, 캠페인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 문제는 개인의 도덕적 실천과는 관계없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세계적 체재의 구조속에 뿌리박힌 역사적 산물인가에 대한 분석이나 반성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이 말은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이 말은 신앙의 사회적 실천없이는 어떤 근원적인 해결책도 이끌어낼 수가 없다. 오늘날 우리 환경 문제는 일제 식민지로부터 시작된 일제의 제국주의적 정책의 결과였고 농업의 파괴도 식민지 시대의 공업화 과정의 산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환경문제에 대해 문제중심적인 접근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영성과 신학이 바뀌어야 한다. 심적이기 때문에 인간과 장연에 대한 기본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 한 환경운동은 실패할 것이 뻔하다. 예를 들어 보면 도구윤리, 물건윤리의 경우이다. 도구윤리가 정립되지 않으면 쓰레기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 특히 신세대들이 무수한 기호, 섬세한 상품, 가장 편리한 도구와 기계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러한 물건들에 대한 어떠한 윤리적 태도가 없다는 것이다. 물건은 그저 쓰고 버리는 정도이다. 그리고 컴퓨터 FAX, 전자기계, 정보와 입자, 수많은 도구와 물건들로부터 이미지를 받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윤리적 정립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전통 윤리학은 여기에 대해 아무것도 제시해 주지 못하나 기술 시대, 소비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가 필요하다는 점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는가? 대안이 있다면 어떻게 모색하고 전개할 것인가?
미래의 새로운 세기는 (2000년 이후)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사는 대로, 소비하는 대로, 가치관 대로 변할 것이다. 곧 이상기후로 식량이 모자라고 전 세계의 식수는 고갈되고 인구는 더욱 증가할 터인데 여기에 대한 대안을 전혀 세워놓고 있지 않다. 미래는 좋은 예측보다도 나쁜 예측이 더욱 많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 위험에 처해있는가를 알 수 있을텐데 그야말로 무위기의 위기이다.
첫째, 신학과 영성을 근본에서 바꾸자는 것이다.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계시는 두 묶음, 즉 성서와 자연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의 신학은 말씀을 더욱 강조했다. 우리는 자연을 무시하고 잃어버렸다. 자연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전통을 회복할 시기이다. 지구, 나무, 흙, 물, 공기 심지어 티끌까지도 공경하는 윤리로 확대해야 한다. 지혜의 윤리에서 경외의 윤리로, 성과 속의 이분법의 영성에서 공생의 윤리로, 구원론적 영성에서 창조론적 영성으로, 원죄만으로가 아닌 원복으로도, 의무지향적인 관리자 윤리에서 신비주의와 우주적 그리스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성 프란치스꼬를 재해석하여 영적인 생태학, 생태학적 전례를 재 창조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전례의 무기력도 도그마의 토착화에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창조영성의 토착화로 풀어나간다면 틈이 보일 것이다. 영성과 신비를 성직자와 수도자만 독점하고 신자들은 나무로 된 십자가나 돌로 된 성모상을 숭배한다면 이것은 원시정령시대의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의 신앙을 더 이상 방편의 도구로 삼아서도 안된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성체만, 십자가만, 성당만, 성서만, 성직자만 모실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흐름을 모시는 영성이 요청된다. 마찬가지로 이 지구도 거대한 물질 덩어리가 아닌 살아있는 유기체, 가이아의 하느님으로 모실 떄 지구 파국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생태학이란 원어그대로 집의 학문이다. 생태환경의 위기란 집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 내면의 집이 탐욕과 욕심으로 병들어있다는 것과 같다. 깔 집(지구)과 안집(영성)이 같이 간다. 지구의 병듬은 우리 내면의 병듬이다. 그러므로 환경문제의 해결도 영성의 회복에서 이루어진다. 이영성은 구원론적 영성이 아니라고 본다. 이 구조는 과감히 버려야 한다. 과거 신비주의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전통적으로 서구에서는 정치의 덕, 가정의 덕, 시민의 덕이 있었다. 오늘날은 우리에게 생태학적 미덕이 필요하다. 이 미덕은 청빈의 정치학이다.
메타 소비사회에 이 인간의 탐욕, 소비욕구를 죽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물자를 낭비하는가. 이를테면 소비계층의 소득은 세계 전체 소득의 64%를 차지하는데 이는 빈곤계층 소득의 32배에 달한다. 물자의 신성함과 물건을 공경하는 것을 배우는 것도 미덕에 속한다. 예컨대 물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려면 물 없이 지내 보는 것이다. 이제 다시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 숙련기능과 생산적능력을 가꾸고 보존하는 법을 우리 신세대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 다음은 개인의 도덕적 실천만으로 부족하다. 사회적인 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기초 공동체의 조직 즉, 가정과 지역공동체의 재 조직이 필요하다. 이 미덕, 영성 그리고 실천은 공동체안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이 나오는데 이 경쟁적 소비적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는냐하는 문제이다. 이제 더 이상 세계화는 서양 지향적 근대회가 아니다. 전통의 두레, 공동체를 조직하는 문제이다. 자본주의도 아닌 새로운 생산-소비 구조, 소비자가 생산을 결정하고 지역 공동체 즉 생활협동조합의 조직속에 소비가 이루어진다면 소비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어느 곳이나 소비자 중심의 생협이 조직되어 대단위 쇼핑단지가 그 지역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환경운동의 생태학적 대안은 교회안에 기초 공동체의 운동을 생활 공동체의 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른바 정치의 생활화이다. 지방 정부나 국가, TV의 간섭을 배제하고 주민 스스로가, 반원 스스로가 민주적으로 일상의 삶의 문제를 토론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공유의 틀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작고도 생태학적이며 필요에 의해서 소비하는 주체적인 소비활동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도시와 농촌의 유기농 직거래에 의한 협동조합조직, 식품의 상품화를 막기위한 식품협동조합, 공동육아, 생활공동체의 의식주 모임을 위해 설립할 수 있는 것이다. 스페인의 모드라곤 공동체도 그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 토지매입에 의해서 자급자족 경제로 나아간다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앞으로 세계는 정보화 시대로 더욱 넓어지는 반면에 생활의 시대로 작아질 것이다. 이제 교회는 단순히 환경문제로 사목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문화관, 새로운 가치관으로서 교회의 틀을 짜야 할 것으로 본다. 여성생태주의자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고 창조영성에서부터 생활을 공동체로 자발적으로 나누는 생협조직, 공동체의 조직을 서둘러야 한다.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본다. 교회라는 기본 조직과 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당 조직안에 살아움직이는 모든 것을 님이라 부르는 영성과 생활 (의ㆍ식ㆍ주ㆍ생ㆍ로ㆍ병ㆍ사) 즉 경제와 소비까지도 나누게 될 때 하나의 진정한 풀뿌리 혁명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어려운 과업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문제는 지금의 자본주의적 시장질서를 어떻게 성화(聖化)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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