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다. 자기가 저지른 죄의 결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날 때 그 양심은 마지막 불꽃이 반짝 비친다. 카인이 형제 살해로써 인류의 최초 흉악범으로 기록되었다면 유다스는 스승이신 주님을 팔아 넘김으로써 최대의 죄인이 되었다. 이 배반은 그저 신의를 저버린 죄가 아니고 하느님의 신의를 저버린 중죄인이다.
그렇더라도 그에게도 마지막 구원의 기회는 남아 있었다. 그 기회를 지금 유다스는 맞이하였다. 물욕에 젖어 세속적인 야망 때문에 주님을 배반했던 유다스는 진작 자기가 배반한 스승이 사형선고를 받는 것을 보고는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유다스가 배반죄를 저지를때 이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안간힘을 쓰며 음모를 꾸미던 유대아인 지도자들의 의도를 그도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자기가 걸려든 예수 파괴의 음모가 실행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는 그만 찔끔하였다. 자기 자신을 제자로 받아 들이고 재무담당이라는 중책까지 말길만큼 신임해 주셨던 스승을 이지경으로 몰아넣은 자기 자신이 몹시도 가련해 보였다.
그 값으로 그는 은전 30냥을 받았다. 30냥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었다(출애21,32). 예수는 한낱 노예의 몸값으로 팔렸던 것이다. 유다스는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 그 거룩한 말씀을 들었고 메시아로 믿었고 하느님의 권능을 많은 기적에서 보았다. 그런데 이런 분을 노예처럼 팔아 넘기다니. 유다스는 그 몸값을 받아 들고 자기의 과오가 얼마나 큰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 돈은 잘못된 계산의 대가인만큼 그 만큼 마음을 짓누르는 무게가 너무나 무거웠다. 그는 이 거래를 물리고 원상 회복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제관들과 원로들에게 가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였다.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내가 죄인입니다』유다스에게 비쳤던 예수는 자기의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줄 수없는 무능력자로 보였을 망정 늘 진리를 추구하는 성실하고 자비로운 인간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다른자들은 그를 극악죄인으로 사형판결을 내리지 않는가. 유다스는 그들에게서 불의한 돈을 받았으니 잘못하다가는 빌라도 재판정에 불려 나가서 거짓증언을 강요당할지도 모른다. 일을 여기서 끝내려고 유다스는 『그분은 무죄이다』라고 증언하였던 것이다.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 하였지만 탕자의 비유에서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가 15, 21: 대목 226, 228 참조)라고 통회한 말과 대조된다.
유다스는 차라리 예수님이나 다른 동료 제자들을 찾아 갔어야 했다. 유다스는 결국 후회하는 가운데 그쳤다. 통회하지는 않았다. 죄의 용서를 받지는 못하였다. 이 죄를 놓고 예수께서는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마태26, 24: 대목 320참조) 단죄하셨다.
지도자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이 할수 있는 죄악의 극에까지 치닫는다. 그들은 죄를 남에게 뒤집어 씌우는 명수들이다. 자기들의 공범자인 유다스의 제안을 한마디로 걷어찼다. 『네 죄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일축하며 자기들의 협력자를 경멸하고 비웃었다. 그리고 유다스가 되돌려준 돈을 유다스의 얼굴에 던졌다. 유다스는 이제는 믿을데가 없어 졌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곳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일은 자살하는 일뿐이었다. 그는 죽기전에 구약성서에 적혀 있는 예언을 마지막으로 이행하였다. 대제관과 장로들이 던진 돈을 모아 성전안에 던졌다. 『나는 그 은전 30냥을 받아 옹기장이를 위해 야훼의 전당에 던졌다』(즈 가 11,12∼13). 대제관들과 장로들은 성전금궤에 넣을까 의논하다가 역시 성서말씀을 따른답시고 그 돈을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들의 묘지로 쓰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그 돈은 「피의 값」이어서 성전 금고에 넣어서는 않되기 때문이었다. 성서에는 창녀들과 남창들의 돈은 성전금고에 넣지 못한다(신명23, 18)라고 되어 있는 것을 부정한 돈으로 해석하여 이 돈을 피의 값이라 하여 부정한 돈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하여튼 피의 값으로 산 땅은 그때부터 「피의 밭」이라 불리웠고 히브리어로는 하켈라마라고 한다(사도1, 19). 유다스는 그후 어디론가 숨었는데 전승에 따르면 바로 이 하켈라마로 물러갔고 거기서 자살했다. 다윗을 배반한 아히도벨이 목매달아 죽었듯이(사무하 17, 23) 다윗의 자손(메시아)을 배반한 유다스도 자살했는데 마태오는 이것을 생각하여 유다스가 목매달아 죽었다고 했고 사도행전에서는 땅에 거꾸러져서 배가 터져 창자가 온통 터져 나왔다고 한다(사도1, 19).
유다스의 죽음 이야기는 초대교회에서 여러가지로 전해졌는데 지혜서 4장 19절의 불경한 자의 최후에 관한 서술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2세기의 문서 「빠삐아스의 보고문」이 전하는 유다스의 죽음은 환상적이다. 그는 수종(水腫)에 걸려 몸이 기괴하게 부어 올랐고 마차 한대가 통과할수 있는 길도 지나갈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눈은 완전히 부어 오른 살에 뒤덮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유다스는 크나큰 고통속에 죽었으며 이런일이 일어나 장소는 황폐해졌고 오늘날까지도 악취가 나기 때문에 코를 막지 않고서는 지나갈수가 없었다. 4세기부터 유다스가 죽었다고 추정되는 이피의 발은 예루살렘 한놈계곡의 동쪽끝에 있는 것으로 지적되었으며 17세기까지 순례자들의 시체를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