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위에서 매일같이 내리는 수 많은 크고 작은 윤리적 결단과 선택은 평소에 형성해온 양심의 습관에 따라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고 그떄 그때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상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자기가 쌓아온 윤리지식을 총동원하여 심사숙고와 반성을 하자면 그것 자체로 사람을 병적 양심의 상태인 세심증(細心症, scrupulosity)에 빠지게 한다. 우리가 중시하는 섬세하고도 기민한 양심은 세심과는 달리 어떤 행위의 윤리적 성격에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그 행위가 갖는 윤리적 가치와 비가치에 생생하게 반응하여 즉시 선택과 포기가 결단되는 양심이다. 그 반대의 양심은 맹목적 양심이다(盲目的 良心, blind conscience). 윤리적 가치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양심이다. 물론 맹목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선(善)이라는 기본적인 가치에 대해 전혀 눈을 감아 버리는 양심도 있고 또는 어떤 특정 덕목(순결, 소유권 존중, 생명존중 등)에만 눈이 감겨진 양심도 있다. 가치에 대한 이런 무감각의 원인은 윤리적 가치를 무시하는 오만과 모든 계명을 자신에게만 너그러이 적용하는 자기관용에 있다.
기민하고도 섬세한 양심은 양심이 성숙을 이루었을 때 더욱 확실하게 작용한다. 누구든지 어릴때는 부모의 권위와 지시에 순종하면서(미숙한 양심) 차츰 차츰 독자적 양심 판단을 하는 상태로 성장한다(성숙한 양심). 어른이 되어서도 처벌의 공포 때문에 법과 계명을 지킨다면 그는 미숙한 양심(must-conscience)의 소유자이다. 그렇지 않고 윤리적 가치를 깨달아 인격적 책임감을 가지고 스스로 윤리적 판단을 하는 사람은 성숙한 양심(=당위적 양심, ought-conscience)의 소유자이다.
평소에 성숙한 양심, 기민하고도 섬세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어떤 행위의 가부, 선택과 포기를 결정할 때 그가 지닌 양심습관대로 재빠르고도 섬세하게 그 행위가 지닌 윤리적 가치와 비가치를 판단하지만 실은 그 판단에도 어떤 규칙이 작용한다고 볼수 있다. 즉, 그가 내리는 양심판다, 그리고 그 판단대로 행한 행위는 양심판단의 규칙에 따라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 규칙이 바로 정당성(올바름)과 확실성이다. 즉 양심의 판단은 올바른 판단(선 악을 잘 구분함)이어야 하고 확실한 판단(선 또는 악임을 확신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행위는 도둑질이며 그것은 악이다』라고 판단했으면 그것은 「옳바른 판단」이고 『이 경우의 도둑질이 악일까 아닐까』의심을 하지 않고 『그것은 확실히 도둑질이며 악』이라고 확신을 했으면 그것은 「확실한 판단」인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섬세하고 기민하여 성숙한 양심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확실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갈등을 겪는 경우들은 수없이 많다. 이런 경우의 양심을 의심하는 양심(회의적 양심, doubtful conscience)이라고 한다. 어떤행위에 대해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 또는 합법적인지 아닌지, 그래서 그 행위를 해야 할지 포기해야 할지, 또는 해도 되는지 하면 안되는지에 대해 확실히 결정하지 못하고(불확실성) 망설일때 즉, 의심하는 양심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 의심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행동으로 옮겨서는 안된다. 의심이 생기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한가지 행위가 두가지 서로 모순되는 결과를 동시에 낼 것이 예상될 때(예, 치료를 하여 어머니를 살리는 좋은 결과와 함께 태아가 죽는 나쁜 결과도 일어날 때), 두가지 서로 상반되는 가치중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을 때(예, 정의를 위해 살인? 위급한 두 중환자중 누구를 먼저 치료? 등). 어떤 윤리규범이 특정한 경우와 시점에서도 효력이 있는 지가 의심될 때(객관적 규범의 구체 상황에서의 효력문제)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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