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이 끝닿은 사방의 지평선까지 펼쳐진 대지(大地)의 장대한 수수밭은 장춘을 처음 찾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과 함께 위압감마저 들게 하였다.
북경을 떠난 8월 13일 장춘에 도착한 한국교회사연구소 중국교회 순례단은 곧장 장춘에서 서북쪽으로 70여리 떨어진 신자촌 「소팔가자」(小八家子)로 향했다.
소팔가자는 김대건ㆍ최양업 신부가 마카오에서 철학 공부를 마치고 이곳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또한 귀국로를 모색하다 1844년 12월에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로 서품된 유서 깊은 곳이다.
순례단이 소팔가자에 들어서자 성당 종탑에서 손님이 온 것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종소리가 채 그치기 전에 3백여 명의 신자들이 성당으로 몰려와 반가이 맞아주었다.
1985년에 새로이 지어 말끔히 단장된 지금의 소팔가자 성당에서는 과거 한국의 성직자들이 생활했던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제대 오른편에 예수 성심상과 함께 경건하게 모셔진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상에서 김신부에 대한 이곳 신자들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례단은 이곳 신자들과 함께 주일 미사를 봉헌했다. 이 미사에서 순례단은 김대건. 최양업 신부의 믿음을 회고할 수 있었고 이들 두 분의 믿음을 이어받아 우리 믿음을 증언하는 증거의 삶을 살 것을 다짐했다.
중국 신자들의 환송을 뒤로 한 채 버스에 오른 순례단은 장춘에서 하루를 묵고 백두산을 향해 연길(延吉)로 떠났다.
연길에서 백두산으로 향한 노정은 한마디로 혹독했다. 낡고 비좁은 버스 속에서 밤을 꼬박 새며 비포장 길로 10여 시간을 달렸으나 백두산은 천지의 비경을 순례단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밤새 차창을 때리는 빗줄기도 아침이면 그치겠지 하며 애써 태연해 했으나 날이 밝아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래도 광복 50주년이 되는 8.15에 민족의 영산에 오른다는 기대감으로 강행. 백두산에 올랐으나 오리무중(五里霧中)같은 오늘날 우리 민족의 현실을 보여주는 냥 천지는 깊은 안개 속에 잠겨있었다.
천지를 보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천지에서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미사성제를 봉헌하리라 계획했던 순례단은 궂은 날씨로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용정으로 발길을 돌려 용정성당에서 성모승천대축일과 광복 5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8월 16일 상해로 가기 위해 야간열차를 타고 다시 장춘을 찾은 순례단은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가 머물던 위황궁(僞皇宮)을 둘러보았다.
1995년 8월 17일 한국교회사연구소 순례단이 중국에 머문지 이레째 되는 날. 이날은 바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사제로 서품된 지 1백50주년 되는 날이었다. 전날 상해에 도착한 순례단은 아침 일찍부터 김대건 신부와 관계된 상해의 성당을 방문하기 위해 서둘렀다.
순례단은 김신부의 사제서품식이 거행됐던 금가항(金家巷)성당을 방문하기 위해 본당주임 진흔덕(?昕德. 마티아) 신부를 만나고자 매괴 성당에 들렀다.
상해 변두리 공장지대 한편에 위치한 금가항성당은 문화혁명 때 모두 파괴돼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지금도 매괴성당의 공소로 전락해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공장 건물을 개조한 듯한 성당은 제대 정면에 루르드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고 좌우 양 옆에 예수성심과 목자상 액자가 장식돼 있었다.
또한 금가항성당 오른편에 마련돼 있는 김대건 신부 경당에는 김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신자들이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즈음해 기증한 동판이 붙어 있었다.
금가항성당에서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 1백5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한 순례단은 미사가 끝날 때까지 모두 벅찬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흐느껴야 했다.
1백50년전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는 바로 이곳에서 한국인 최초로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신학교 성당인 「횡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고 일주일 후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귀국길을 서둘러 중국을 떠나 10월 6일 지금의 나바위 강경포에 도착했다.
금가항성당에서 김대건 신부 사제서품 1백50주년 기념 미사를 주례한 최석우 신부는 미사 강론을 통해 「김대건 신부는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강조하고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김신부 앞에 깊이 반성하고 민족 복음화를 앞당길 수 있도록 믿음과 생활을 일치시켜 나가자」고 역설했다.
이에 한국교회사연구소 임직원들은 기도로써 사명감을 가지고 교회사 연구소가 하는 일에 보다 충실하게 임할 것을 약속하고 교회사연구소가 더욱 발전해나갈 수 있도록 함께 해줄 것을 성 김대건 신부에게 전구했다.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 1백5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한 후 경당에 안치돼 있는 김신부의 유해에 친구(親口)를 마친 순례단은 김신부가 첫 미사를 봉헌한 횡당성당을 순례했다.
이날 오후 상해 임시 정부 청사와 윤봉길의 사의 항일 혼이 서려있는 홍구공원 방문으로 중국순례 일정을 모두 마친 한국교회연구소 중국교회 순례단은 겨자씨 같은 자신을 죽일 줄 아는 희생만이 민족의 복음화란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이젠 한국 신자들 가슴마다에 꺼져가는 불씨로만 남아있는 신앙선조들의 복음 정신과 역사의 흔적들에 새삼 무관심했다는 자책이 순례단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던 이번 순례를 마감하면서 한국교회사연구소 중국교회 순례단은 신앙 선조들의 고귀한 순교 정신을 알리는 일에 성심을 다할 것을 서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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