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는 유대아인들이 데리고 온 예수사건이 종교적인 사건으로 처리되기를 원했고 따라서 자기는 이 사건에서 발을 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집요하게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몰고 나갔다. 빌라도는 그들의 계획대로 몰리고 있었다. 그는 예수가 정치적인 야심가가 아니라는 심증을 가졌지만 이점을 명확히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군중을 떠나 관저안으로 들어가 피고인 예수를 불러 들였다. 예수의 입에서 정치범이라는 혐의를 벗기고 싶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네가 유대아인의 왕이냐?」라고 물었다. 여기서「유대아인의 왕」이란 말은 상당히 역사적인 뜻을 지닌 호칭이다. 기원전 168년에 마카베오일가가 시리아의 통치에서 조국 유대아를 해방시키는 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유대아의 왕」「유대아의 해방자」란 명칭을 받게 되였다.
그후 마카베오왕가는 민족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 지도자로 추앙을 받아왔다. 그후부터 유대아인의 왕이란 말과 메시아라는 말은 민족의 해방자란 뜻으로 구별없이 사용해 왔다. 예수의 전교초기에 제자들의 첫 그룹을 부를때 나타니엘이 에수를 뵙고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 십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했다. (요한1,49).
유대아인의 왕과 이스라엘의 왕은 동의어(同義語)이다.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입성하실때에 군중이 환호하며「이스라엘의 왕 만세」를 부르짖었다.(요한12,13). 나타니엘의 고백과 예루살렘 입성시의 군중의 환호성은 예수께서 참된 믿음에서 우러 나오는 참 뜻의「그리스도왕」으로 받아 들이셨다.
그런데 지금 빌라도가 물은 말은「그래 네가 유대아인의 왕이란 말이냐」라는 뜻으로 물론「아니다」라는 말을 예수의 입에서 듣고 싶었던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의 겉모양으로 보아 도저히 헤로데왕 대신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하는 정치적인 야심가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예수께서도 놀라운 기적을 보고 군중이 달려들어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고 했을때 기가 막혀서 아무 말없이 그 자리를 피한 일도 있다(요한6,15).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물음에「그렇다」라고도 대답할 수 있었고「아니다」라 고도 대답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분명 하느님 나라의 왕인데 구약의 사상에서는 이스라엘 또는 유대아가 하느님 나라라고 했었고 예수님은 실제로 이 하느님 나라의 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께서는 정치적으로는 왕이 아니고 구세사적 견지에서는 참된 왕이다. 예수께서 탄생했을 때에 외국 먼 나라에서 아기 예수를 찾아온 세 박사들은 새로 나신「유대아의 왕」을 찾을때 이미 예수의 신원이 계시되었었다.
빌라도는 이 질문을 할때 빛을 앞에 놓고 그 빛을 보느냐 못 보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태도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당신은 그 말을 마음으로부터 우러 나와서 하는 말이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전하는 것뿐이요」라고 되물으셨다. 빌라도는 유대아인들이 하는 말외에는 예수께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니 자기 생각에서 예수를 유대아인들의 왕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일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다른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아인에 대하여 경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유대아인인줄 아느냐?(그런 판단은 네 스스로 하게)」라고 좀 언짢은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온 나라 그리고 대제관들이 예수를 자기에게 고발하여 넘겨 주었는데 예수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자기의 무죄를 구차스럽게 변론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에 앉아 있는 막강한 권력자에게도 하느님 나라를 설파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그 나라의 성격을 확실히 깨우쳐 주어야 했다. 유대아의 지도자들 앞에서도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단호히 선언하셨다. 왕국에 관하여 관심이 있는 빌라도에게는 당신의 왕국이 하느님 나라이며 그 나라는 세상의 왕국과는 다르며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하셨다.
이 예수의 왕국론은 후대에 교회가 속권과의 관계 설정에서 확고한 교리로 확정되었다. 그 혹독한 로마 박해시대에 주님의 형제이며 사도였던 유다의 손자들은 황제 도미시아누스의 그리스도 왕국에 대한 질문을 받고「그 왕국은 세속적이거나 세상 것이 아니고 천상적이며 천사적이다」라고 대답했고 이어서「그 왕국은 세상이 망할때 완성된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유세비오의<역사>,III,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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