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가톨릭 인권운동이라 하면 주로 과거 독재정권시절 정치권력에 희생당한 사람들과 산업화과정에서 크게 희생당한 산업노동자와 농민들에 대한 연대활동이라 특징지을 수 있다.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 구속사건 때와 같은 양심수 구원활동과 동일방직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활동, 시국선언 형태의 인권성명 발표가 대표적인 예들이다. 횡포한 정치권력에 맞서는 인권운동-교회 밖의 인권운동에서도 그리고 다른 나라 인권운동사에서도 이 유사성을 볼 수 있다. 「독재권력」이 인권운동의 출발점이자 대상이었다.
자연 인권문제는 정치적인 연관성을 갖는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되었고「인권」의 핵심인「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보편적이고 최소한의 불가침 기준」에 대한 폭넓은 접근은 경시되었다.
여기서 눈을 돌이켜 인권의 발달사를 살펴보면 그동안 교회 안팎의 인권운동이 놓친 인권의 풍부한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다. 보통 인권 개념과 제도는 세단계를 거쳐 발전해 왔다고 이해한다. 이른바 1세대 인권은 국가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지칭하는데 여기에는 표현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참정권, 사상과 양심의 자유 등이 속한다. 근대 시민혁명기에 가장 관심을 모았던 내용들로써 국가권력으로부터의「자유」를 규정하는 권리이다. 그러나 근대국가 성립이후 산업화에 따른 불평등과 빈곤상황에 직면해서 노동권, 사회보장권, 노동조합권, 교육의 권리, 아동 및 모성 보호, 최저 생활수준보장 등 사회적「평등」을 규정하는 권리들이 주목받게 되었다. 2세대의 인권들로서 사회적 인권이라고도 한다. 3세대 인권은 소위 세계화 현상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데 환경권, 민중자결권, 평화를 누릴 권리, 재해시 보호받을 권리 등의 신세대 인권이다. 즉 개인과 국경을 넘어 집단간의「박애」또는「연대」를 표현하는 권리이다.
▩인권 발달사
인권의 발달사는 어떻게 보면 자유, 평등, 박애라는 근대 시민혁명의 정신을 차례로 권리화하는 과정으로도 보인다. 3세대에 걸친 인권의 발달은 단지 어휘상의 발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 대다수 국가들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보편적인 기준이 되어 현재 수많은 국제인권법으로 명문화 되어 있다. 민주적인 정부와 국민은 이 국제법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뿌리는 다르지만 3단계를 거쳐 발전해온 국제인권법은 보편적인 인권규범의 명세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긴 인권목록의 밑바탕에 면면히 흐르는 공통점은「평등」과「소수자보호」라는 정신이다. 인권은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적용되며 소수자-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저기준이라는 점에서 기본적 권리를 뜻한다. 그러므로「최소한의 도덕적 계약」으로서 인권은 국경을 넘는 보편성을 갖게 된다. 또 개개인의 기본 권리이기 때문에 불가침이며 사회질서의 합리적 기초가 된다. 나아가 사회의 합리성을 증진시키므로 사회진보의 토대이자 지표가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은 상당히 뒤처져 있고 우리의 인권운동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이른바「광복」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인권교육을 한번도 제도화한 적이 없다는 데에서 오늘의 현실은 당연한 지도 모른다. 교회인권기구에서도 과거 정의와 평화라는 지붕은 쌓아 올렸지만 온갖 인권의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본 적이 없다.
▩「평등」「소수보호」정신
우리 사회에서 목도되는 추상적인 도덕규범과 실생활의 구체적인 도덕규범과의 괴리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유엔을 통해 지난 반세기 동안 축적된 다양한 인권규약의 내용에 비하면 한국의 인권 보호실태는 실로 부실하고 위험한 건축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왜 인권이 중요하고 인권교육이 절실한가를 확인하는 길은 이 사회가 사실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인지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인 성폭력 발생율과 교통사고 발생율, 산업재해 발생율 및 가정폭력 발생율, 그리고 정치적 이유에 의한 구속자수, 대형사고시의 혼란과 피해의 규모, 권력형 인권침해자의 불처벌 등이 그 지표다. 또 생활의 보다 일상적인 데에서는, 주택가 골목에서 차량 운전자들이 행인들에게 부리는 횡포가 어떠한지, 여직원 채용시 어떤 신체규정이 적용되는지, 여성 아동 노약자 외국인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얼마나 무시되고 차별받는지, 성인 흡연자들의 아이들에게 끼치는 해가 어떤 지경인지, 서울과 같은 도시가 보행장애인들이 이동하기에 얼마나 비상적인 곳인지, 아이가 있는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아무도 제대로 책임지거나 처벌받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그 심각성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우리의 사회복지제도가 사회적 약자들에 가하는 고통이 사실상의 폭력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교회인권운동 다변화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인권운동은 일반적으로 양심수문제와 같은 정치권력의 피해자에 집중되어 왔다. 이는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 본의 아니게 놓친 분야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교회 인권운동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권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인권운동에 다변화와 현대화가 동시에 필요하다. 다변화를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피해자에 대한 보살핌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생활 모든 분야에서 미진한 부분을 인권기준으로 개혁해 나가는 시민적인 생활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국가권력에 의한 피해자 만큼이나 사회적 강자, 경제적 강자에 의한 피해자에 대해서, 그리고 더 근복적으로 사회의 폭력성을 줄이고 합리성과 연대성을 증진시키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에서는 인권운동이 가지는 규범적이고 가치론적인 차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권의 규범적 가치론적 특성을 살려서 인권교육, 인권사목이 개발될 필요가 있다. 인권교육, 인권사목, 인권운동이 활성화되면, 모든 것이 중앙정치권력에 모아져 있는 나라에서 시민사회의 규범과 가치를 강화하는 일이 되므로 우리 사회를 아래로부터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 또 교회는 그 도덕적ㆍ윤리적 권위와 인권기준을 가지고, 정치종속적인 전근대적인 사법부가 인권보호를 소홀히 하는 현실을 준엄히 질타함으로써 권력에 대한 감시자의 역할을 더욱 잘 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매우 복잡해지는 사회다. 때문에 계속 새로운 규범과 가치를 필요로 한다. 이제 알권리나 미디어접근권 환경권과 같은 기본권을 도외시하고 더 이상 사회정의를 말하기 힘들어졌다. 평화도 이제는 하나의 염원이 아니라 전쟁과 핵사고 등 현실적인 위험에 반대하는 민중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중요한 사회사목분야였던 사회복지도 이제는「도움이나 시혜가 아닌 권리」로 정착되어가는 추세이다. 평화와 복지가 만나는 곳에 군비축소의 문제가 있는데 이 역시 정치 이슈 이전에 인권의 문제로도 취급된다. 해외원조도 최근에는 자선활동이 아닌 인권활동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처럼 교회의 정의, 평화, 복지, 원조 모든 분야가 인권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국가권력에 의한 정치적 피해가 가장 두드러져 보였기 때문에 교회의 인권 이야기가 협소해 진 것뿐이다. 이제 인권에 대한 협소한 관심은 새롭고 전면적인 그리고 현대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ㆍ전면적 도전
교회 인권운동이 이러한 도전을 수용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갖는다. 첫째로는 인권의 보편적 기준은 국제적으로 합의된 많은 수의 인권규범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인권운동의 활성화는 국제적인 인권규범을 사회사목의 기준에 수용하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 인권운동은 그럼으로써 사회사목의 기준과 내용을 풍성하게 그리고 체계화할 수 있다. 세번째로는 보편적 규범에 기초한 활동의 당연한 특징으로서 교회 밖의 여러 시민운동과 연대성을 갖출 수 있다. 네번째로 인권규범은 최대의 희망사항이 아니라 최소한의 기준이기 때문에 불가침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 인권운동이 활성화되면 부당한 권력으로부터의 불가침의 영역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약자들을 지켜온 교회의 정의평화운동의 전통을 잇는 것이다. 다섯번째로 현재 한국사회의 인권규범은 국제적인 규범에 비해서 상당한 차이가 있으므로 교회 인권운동은 다른 인권운동과 마찬가지로 사회개혁성을 갖는다. 여섯번째로 인권규범이란 보편성을 그 생명으로 하기 때문에 사회의 보편적 기준 또는 판단척도로서의 인권은 우리 사회의 합리성을 증진시킨다. 일곱번째로 인권이란 인간존엄성을 권리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 인권운동을 통해서「하느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존엄성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발견되며 어떤「계약」으로 규정되는가가 드러나게 되므로 인간존엄성에 대한 인식의 현대화에 기여한다.
▩인권운동 발전 방안
이러한 의의를 확인할 때 교회 인권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방안을 검토해 볼 수 있다.-청소년 인권강좌, 연속적인 인권 세미나 등의 인권교육 캠페인 : 사회사목 내 인권사목의 설정과 공식인권기구의 설치: 교회 인권운동단체에 대한 지원과 타 인권 단체와의 교류 확대: 인권정보 자료실의 설치 및 환경과 인권, 평화와 인권 등의 인권교양 자료의 발간: 시민인권수첩 발간: 국제기구의 인권회의 및 토론회에 적극 참가: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생각하는 교우모임 등「OO의 인권을 생각하는 모임」의 다양한 형성: 사법부의 인권침해 사례나 경향에 대한 감시와 비판 등.
그 중에서도 인권교육은 시민의식 성숙이 핵심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 인권교육의 내용으로는 이미 성공회대학이 정규강좌로 개설한 바 처럼, 인권의 개념과 종류, 인권의 발달사, 우리가 비준한 여러가지 국제인권 규약의 내용,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인권침해 경향, 생활상의 관습적인 인권침해, 인권침해시 구제절차, 우리의 몸에 밴 차별의식, 인권운동의 의의, 아동의 인권의식을 높이는 쉬운 방법, 인권과 사회정의, 인권과 평화, 인권과 환경, 평신도 인권실천 방법, 권리와 계약 그리고 공동체 등 다룰 수 있는 것이 많다.
▩인권교육「부재」
무엇보다도 인권교육의 핵심은 반(反)차별과 소수자보호의 정신이기 때문에 인권교육은 어떤 교리교육이나 사회교육과정에도 수용될 수 있다. 그리고 조기에 할수록 좋다. 중요한 것은 교육받는 이들이 이 두가지 핵심적인 가치관을 체계화하는 것이므로 가장 좋은 길은 역시 실습이다. 지금까지 교회의 다양한 사회사목단체들은 그러한 실습을 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약간의 준비만 있다면 교회에서 인권교육하기는 매우 쉬운 편이라 할 수 있다.
인권과 기독교는 결코 멀지 않다. 오히려 인권의 보편성은 기독교 세계주의와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평등하게 만들어진 인간과 인위적인 경계를 뛰어넘는 이웃됨, 그리고 약자에 대한 사람 등 인권사상과 기독교정신은 친밀감이 깊다. 「자유」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또 양자의 밑바탕을 이루는 보편주의는 항상 해방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힘이었다. 보편주의란 열린 공동체의 질서개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제는 국가간의 질서로서의 세계가 아닌 새로운 세계가 이미 태동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각국의 시민사회의 수평적 연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일 게다. 지금 이 시대, 탈냉전 시대의 큰 특징의 하나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더 이상 국가란 틀 속에 가둬둘 수 없는 가치로 새롭게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는 연대함으로서 즉 이웃이 됨으로서만 가능하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인권은 그러한 열망과 가치를 표현하는 언어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연대의 언어로 등장한 것이다.
▩교회관심ㆍ변화 기대
뒤돌아보면 지난 반세기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이 흐름이 가로막혀 있었다. 냉전이 우리에게 인권보다는「국가안보」라는 국가주의적 목표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국가안보의 고지에 올라서는 연대성과 공동체가 자리잡기 힘들었다. 이는 낡은 관념이었고 대다수 사람들에게 허구적인 것이었다. 반면 인권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허구적인 가치를 사람의 삶을 중심에 두는 실질적인 행복의 가치로 대치시킨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풍부한 만큼 인권의 깊이와 너비도 크다. 새로운 반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의 인권운동도 그만큼 변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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