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세상의 군주들과 앞으로 교회를 이끌어 나아가야 할 제자들을 비교하면서 세상 군주들은 백성을 힘으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르며 통치하지만 제자들은 교회를 다스리며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하느님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은 남에게 종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태 20,25).
지금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나의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씀하셨다.『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예수의 왕국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세상 군주들처럼 폭력을 써서 얻은 왕국이 아니며 세속의 권력과 명예와 그 밖의 온갖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러한 왕국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늘 말씀하셨듯이 예수의 권한은 위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사람들 즉, 백성에게 참 삶을 주기 위한 봉사의 왕권이다. 사도이후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은 세상이 끝날 때에 나타난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 믿음의 뜻은 예수의 왕국이 세상이 살아 있는 역사과정을 통하여 늘 노력하는 왕국으로 임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왕국은 세상 것이 아니지만 세상안에 늘 살아 하느님의 이념을 세상에 구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그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라고 기도 드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국은 육체의 나라가 아니고 영성의 나라이다. 그러니 유대아인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걸어 스스로 유대아인의 왕이라고 고발한 것은 빌라도는 조금도 마음 쓸 필요가 없다. 영성 세계의 왕국에는 무기나 폭력을 쓰는 군인들이 필요없다. 다만 이 왕국을 지키는 병력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의 천사들이고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다.
로마의 군인들이 예수를 잡으러 왔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강도잡듯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느냐?』그리고 이에 맞서 칼로 대항하는 베드로에게『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는 법,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열두 군단도 넘는 천사들을 보내 주실 것을 모르느냐?』라고 말씀하셨다(마태 26, 52~55). 이러한 뜻에서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아인들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유대아인들은 예수를 잡으러 갈 때에 제 군대도 아닌 남의 군대를 빌려 가지고 폭력으로 예수를 체포하였고 예수께서는 온순하게 고분고분 잡혀갔다. 미움에 대하여 온순함으로 대처했다. 세상 나라에 대하여 하느님 나라의 대처 방법이 있다. 빌라도는 예수의 말씀의 요점을 파악하지 못하고「나의 왕국」이란 말에만 신경을 썼다. 그래서 이점을 명확히 하려고 예수의 고백을 다그쳤다.『하여튼 네가 왕이냐?』이 질문을 중복하는 것은 로마법정의 관례이다. 로마법정은 피고의 자백을 받기 위하여 세번 같은 질문을 하였다.
예수의 입장에서는『그렇다』『아니다』라고 딱 부러지게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예수는 세상이 생각하는 성질의 왕이 아니며, 또 그 반대로 구세사적인 측면에서 장차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한다』(요한) 또는『네가 그렇게 말한다』(공관복음서)라고 대답하셨다.『네가 말하는데 그렇다』라는 뜻도 되고『네가 생각하는 그런 왕은 아니다』라는 뜻도 된다. 이러한 뜻으로 대제관이『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냐, 메시아냐?』라고 물었을 때에도 같은 뜻으로 대답하셨다(마태 26, 63~64). 예수께서는 이어 당신이 어떤 왕인가를 알려주는 설명을 덧붙이셨다.『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내가 이 세상에 와서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은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로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예수는 실로 진리의 왕이시다. 예수의 부하가 있다면 오직 진리의 말씀을 듣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 뿐이다. 그래서『진리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재판은 판관과 피고가 뒤바뀌었다. 빌라도는 자기가 진리를 따르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밝혀야 하는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엉겁결에『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되물었다. 이 말을 내뱉고는 예수의 무혐의를 마음에 굳히고 밖으로 나가 유대아인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하였다』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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