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금년으로 해방 50년을 맞이하였으나 그것이 통일의 희년이 되지 못하여 매우 서글프고 안타깝다. 독일, 베트남, 예멘 등은 통일을 완료하여 나름대로 사회문화적 이질감 해소와 정치경제적 공동체 건설을 향해 날로 매진하고 있는데 남한과 북한은 여전히 이념과 명분과 체면 싸움에 지구상에서 마지막 냉전의 고도로 남아있다.
남ㆍ북사상의 왜곡
그런데 남한과 북한은 각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념형과는 거리가 먼 체제를 유지해 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남한의 자본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의 허울아래 과거 권위주의 체제를 근간으로 국가자본주의의 성격을 띠어 왔다면, 북한의 사회주의는 인민주주의의 외양 아래 지금까지 일인독재체제를 토대로 국가사회주의의 특질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것이다. 남한의 반공사상과 북한의 주체사상이 제각기 자유민주주의와 인민주의의 왜곡된 표현이라 할수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회주의는 사상으로 시작하여 운동으로 발전하고 체제로 귀결되었다고 할수 있다. 물론 운동의 단계는 변화한 사상을 포함하며 체제의 단계 역시 변화한 사상과 운동을 포함하면서 복잡하게 변화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목도하였듯이 1989년에 시작된 「벨벳 혁명」으로 통칭되는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는 사회주의를 역사 속으로 묻어버린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냉전체제의 붕괴는 우리가 사회주의를 고정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역사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된 상황에서 그로부터 탈출하려는 지향으로 등장했다기보다는 자본주의 사회, 근대 시민사회의 탄생과 동시에 태어난 비판적 동반자였다. 사회주의는 산업혁명기에 사회를 이상주의적 공동체로 재조직하려는 희망을 피력한 생시몽, 푸리에 등에 의해 역사 속에 출현한다. 맑스가 자신의 사상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들을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한 것은 이들의 사상이 갖는 계몽적 휴머니즘적 근대 자본주의 비판의 성격을 잘 요약하고 있다.
사회주의 선두 소련
소련은 현실에서 구현된 사회주의 체제의 제1세대라고 할수 있다. 대부분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은 독일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였지만 레닌은 직업적혁명가들로 구성된 전위당을 통해 러시아에서 혁명을 성공시켰다.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자들은 기득권을 포기하는 위험을 쉽게 무릅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혁명은 노동계급과 의식있는 인텔리겐차가 모두 형성되어 있었던 유일한 반주변부 국가인 러시아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사회주의 체제의 제2세대가 등장하였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1945년 이후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동독에 진주하여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도록 하고 그들을 위성국으로 만들어 사회주의 「제국」을 창설하였다. 또한 아시아의 중국 발칸 반도의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는 외부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이후 소련과 일정한 긴장관계에 놓이게 된다.
냉전구도 형성
이렇게 해서 명실상부하게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체제와 소련 주도의 사회주의 체제 간의 대립이라는 냉전구도가 형성된다. 그러나 전후의 세계 지정학을 구성한 얄타 체제라는 것이 2차대전이후 미. 영. 소사이의 유럽의 분할을 둘러싼 합의가 그 본질이고 보면, 미소의 적대적 성격을 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이 채택된 뒤에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미국은 세계체제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으로 스탈린주의를 이용했고 군수산업은 전후 미국 경제의 근간이 되었다. 소련도 전시 체제의 지속을 통해 사회의 통합을 유지하려고 하였고. 군수산업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할 수 있는 첨단기술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결국 전후 미국의 헤게모니를 보장해준 것은 다름 아닌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존재와 냉전 체제였다. 이러한 미소간의 됫전의 공모는 사회주의 체제 붕괴의 원인을 사회주의 내부에서만 찾을수 없게 한다. 왈러 스타인이 지적하고 있듯이 1968년 혁명은 서구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지배세력에 대한 반란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동구 및 소련의 공산주의 등을 포함하는 「구좌파」에 대한 반란이었다. 그 배경이 된 것은 베트남전을 통한 반전운동의 확산과 미국 경제의 쇠퇴였다. 점증하는 자본의 국제화와 전세계의 지구촌화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위기를 사회주의 내부로 이전되도록 했고 사회주의는 기존의 외연적 성장을 더 이상 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소련연방 해체
경제개혁을 위해 국제관계의 탈이 데올로기화를 주창하고 당. 국가의 일체화 구조를 폐기하고자 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이 페레스트이카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페기를 통해, 억눌려 있던 동구의 인민 혁명을 불러왔고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귀결되었다.
유일한 사회주의 대국으로 남아있는 중국조차 경제적으로는 개방정책과 자본주의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사회주의 체제는 결국 역사 속에서 수명을 다하고 자본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어 나가면서 인류는 세계경제전쟁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있다.
냉전 체제의 해체는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로 이어지면서 지구화. 지역화. 지방화 추세가 복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근대사회 비판, 자본주의 비판의 정신으로 출현한 사회주의의 경험은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여전히 각종 불평등의 원리와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미래에 냉정한 경고를 던져주고 있다.
냉전 이후 세계질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본주의의 범지구화 경향에 따라 거의 모든 나라들이 하나의 동일한 세계체제(world system)안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강도높게 포섭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특히 그 어떤 강대국도 종전과 같이 단일 헤게모니로써 패권적 국제 질서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오늘의 세계체제는 겉으로 볼 때 정치적으로 단극(미국), 군사적으로 양극(미국과 CIS), 그리고 경제적으로 삼극(미국, EU, 일본)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그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인종, 부족, 민족, 종교, 이념, 문화등 여러가지 요소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상태에서 국가들 사이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 관계는 나라마다 서로 불균등한 발전의 맥락에서 상호의존적 이면서도 아울러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갈등과 협력의 소지를 동시에 안고 있다고 보아진다.
새로운 세계질서의 등장이 과연 인류의 평화, 번영, 복지의 증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해서는 학자, 실무자를 포함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대체로 냉전 이후의 세계체제는 통합의 정도는 그 이전보다 높지만 아직은 제도화의 수준이 낮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변화에 능동적 대응
이러한 견지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주목을 요한다.
첫째로, 종래 세계질서의 행위주체인 국민국가의 위상이 현저히 위축되고 있다. 주권국가로서 기능이 지구화와 지방화의 이중적 압력으로 인해 외부의 충격을 여과하거나 혹은 내부의 행위를 조절함에 있어 약화되고 있다. 이것이 국민국가의 자율과 안전을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로, 새로운 세계 질서 아래에서 국가들 사이의 정치, 외교, 군사, 경재, 문화면의 관계가 예전과 같은 정합성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나라들마다 영역에 따라 각기 협조와 마찰이 교차함으로써 이해관계의 갈등이 분산화되어 나타나며 이는 국가내부의 다양한 부문, 집단, 직종 사이의 대립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
셋째로, 특정 강대국에 의한 패권적 질서의 부재는 국가뿐만 아니라 초국적기업, 국제기관, 민간단체 등 다중적행위자의 등장을 통해 이들 사이의 통제받지 않는 독자적 거래를 유발함으로써 분쟁의 개연성을 높여주다.
이러한 역사상 유래없는 광범하고 격렬한 지구화의 추세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변화에 대해 우리는 나름대로의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구화를 「현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적절히 관리할 수 있는 세계화의 「정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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