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가진 사람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하고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납니다. 즉, 희망을 가진 사람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고 또 역사를 새롭게 창조해 가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한마디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이기심 때문에 역사를 파괴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희망지 희망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보다 더 큰 희망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이 세상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고 죽어도 죽지 않는 새 생명이 거기에 있으며 또한 땅에 묶여진것을 초월하는 천상의 놀라운 세계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II 마카7,1~2,9~14)에서는 한 가정의 일곱 형제가 모두 장렬하게 순교하는 감동적인 내용이 나왔습니다. 인간에게는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더 위대한 가치는 무엇이냐? 그것은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의 왕국을 말합니다.
B.C 2세기 경의 희랍은 세계의 정목자로서 뿐만 아니라 그들이 꽃피운 헬레니즘 문화는 전 세계를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국수주의적인 유다이즘과 충돌하면서 많은 피를 흘리게 합니다. 즉, 정복자는 문화적, 종교적으로도 보다 통일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신앙과 관습을 철저히 배척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유다인인 일곱 형제는 돼지고기를 먹음으로써 율법을 모독하라는 희랍의 강요에 의해서 손목이 잘리고 혀가 끊기면서 죽어가는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조금도 죽음에 굴하지 않고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육체가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에로 다시 살아 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희망은 이처럼 죽음을 넘어 갑니다.
사람의 가치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좌우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오늘의 삶을 통해서 내일을 창조하지만, 희망이 없는 사람은 오늘의 삶을 통해서 내일을 포기합니다. 그저 지금 당장 배부르고 편한 것만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잃고 동물적인 삶만이 존재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달리 부활을 믿지 않았으며「지금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원수의 나라인 로마에까지 아부하면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며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기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볼때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소로웠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은 큰 모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황당한 얘기를 만들어 일곱 형제가 한 여자와 차례로 살았다고 했을 때 그 여자는 그러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말해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한 것으로 부활은 허무맹랑한 소리이니 웃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이 없다면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설쳐대며 사는 이를테면 장땡이요 축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더이상 인간 세상이 아닙니다. 짐승처럼 힘센 사람만이 제일이요 간사하고 음흉한 사람들만의 세상이 될것입니다.
오늘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부활의 삶은「지금 여기」의 삶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습니다. 천사들과 같이 영원히 사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르고 세계가 다릅니다.
따라서 세상은 우리를 속인다 해도 하느님은 공평하십니다.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되는 것은 부활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로 올라가야할 이유도 거기에 있고 억울하게 손해보면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가치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지금 여기」의 삶이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희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얻기 위해 여러분은 무슨 수고를 하고 있습니까「지금 여기」에만 묶여 있다면 그는 슬픈 사람입니다. 부활은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꼭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현실에서 먼 미래를 바라보며 하느님의 뜻에 맞게 올바르게 걸어가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삶의 진정한 목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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