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끌려 나온 예수는 머리에 가시관을 썼고 몸에는 진홍색 망토를 걸친 옷차림이었다. 영락없는 왕차림이었다. 빌라도는 이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을 한 예수를 군중에게 내보이며 『이 사람을 보라』라고 외쳤다. 이말은 라틴어로 엑체 호모 (Ecce Homo)로서 복음서에 사용된 말중에 가장 극적인 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후 교회에서는 가시관을 쓰고 창백한 얼굴의 처참한 모습을 한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습 내면에는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이 숨어 있고 고통받는 주님의 종, 메시아의 모습 (이사53, 3)이 숨어 있고 모든 종들의 종의 겉모습이지만 만왕의 왕이라는 예수의 자화상이 숨겨져 있다.
빌라도는 이 재판끝에 결국 예수를 반대자들 손에 넘겨 주면서 『자, 당신들의 왕이다』 (요한 19, 14)라고 내뱉았듯이 자기도 모르는 결에 예수를 그리스도 왕으로 선언한 셈이다. 빌라도가 예수를 매질하고 놓아 주려고 했던 계획은 실수였고 빗나갔다. 매질은 십자가형 전에 가해지는 예비절차이기도 하였다. 자기들 앞에 나선 매맞은 예수를 보고 대제관들과 그 졸개들은 여러 말할 것도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라고 계속 외쳐댔다.
빌라도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서 『당신들이 직접 끌고 가서 십자가에 달아 매시오. 나는 그 사람이 무죄라고 생각하오』라고 발끈해서 말했다. 사건을 정치적으로 몰아 빌라도의 손을 이용하려던 유대인 지도자들은 빌라도의 손을 이용하려던 유대인 지도자들은 빌라도의 태도가 예수쪽으로 기운 것을 알고 작전을 바꾸었다. 그들은 로마정권이 유대인들의 종교를 존중하는 정책을 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을 종교문제로 돌려 빌라도를 협박하기로 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자는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 라고 했는데 이것은 명백한 율법 위반이고 사형감입니다』라고 외쳤다. 사실 예수께서는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명백히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다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요한5, 18)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요한10, 30)라고 가르쳤을 뿐이다. 이 말을 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단정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하는 것과는 뜻은 같지만 법률저촉 문제는 다르다. 율법저촉은 후자의 경우이다.
자기 앞에 서 있는 피고인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빌라도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수 있다. 첫째는 예수를 심판하는데 있어서 유대인들의 주장을 무시한다면 그들이 혹시 로마당국에 이 일을 고발하여 자기는 유대아 점령지의 종교존중 정책을 무시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일 수 있고 둘째는 유대인들의 새로운 고발 때문에 바라빠의 석방을 막고 예수를 석방하려는 자기 계획이 무산 되지나 않을까 해서 두려웠을 수 있고 세째는 예수가 자기를 왕이라고 했다해서 고발하더니 지금은 『하느님의 아들』을 자칭한 죄목을 들고 나왔다. 빌라도는 그동안 예수와의 대화에서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해있지 않다』라는 말을 들은 것과 합하여 생각할 때 혹시 이 사람이 참말로 하느님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해서 덜컥 겁이 났을 수 있다.
다음 예수와의 대화에 비추어 보면 빌라도가 두려웠던 이유는 세번째 경우인 것 같다. 아니면 세 경우 다일 수도 있다. 빌라도는 다시 관저안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출신지를 물은 것이 아니었다. 빌라도는 이미 예수가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떤 영역에 속한 사람이냐고 물은 것이다. 니꼬데모와 유대인들은 『위에서 온 사람이다』라고 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요한3, 13). 예수를 마음으로부터 따르는 사람만이 이 심오한 예수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다. 온통 세속 권력에 묻혀 있는 이방인 빌라도가 이 묘리를 깨달을 리가 없다. 예수께서는 묵묵부답이었다. 이 침묵은 고통받는 종의 모습이었고 (이사 53, 7) 구세주의 죽음을 웅변하는 침묵이었으니 (베드전2, 22~23) 빌라도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빌라도는 답답해서 말했다 『나에게는 너를 놓아줄 수도 있고 십자가형에 처할수도 있는 권한이 있는줄 모르는가? 그런데도 아무 대답도 없는가?』 예수께서는 지금까지의 침묵을 깨고 한가지 가르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모든 권한은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사회학적 교리이다.
『당신이 하늘에서 권한을 받지 않았다면 나를 어떻게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정당한 권한이 있으니 나를 처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예수 처형의 부당성은 빌라도에게 보다는 예수를 넘겨준 유대언들에게 있다. 그들에게는 미움과 거짓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라도도 권력행사에 있어서 정의와 진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현명한 판단과 결단을 요구하는 직무적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고 더욱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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