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권한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교시를 받았고, 또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빌라도는 몹시 곤혹스러워졌다. 그래서 그는 점점 예수를 석방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이 낌새를 알아차린 유대인들은 한층 더 고도의 수법을 써서 빌라도를 자기들의 의도대로 몰고 갔다.
유대아의 종교적 율법을 무시한다는 점을 들어 빌라도를 곤경에 빠트린 유대인들은 이번에는 예수를 석방하는 것은 「황제의 친구」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최고도의 정치적 올가미를 씌워 빌라도를 협박한다. 「만일 그 자를 놓아 준다면 총독은 카이사르의 친구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는 카이사르의 적이 아닙니까?」
대제관 가야파가 예비심문을 하면서 「네가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냐?」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하셨다(마태26, 63: 마르14, 62: 대목 346참조). 메시아라는 종교적 개념을 그들은 왕이라는 정치적 개념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이렇게 조작된 왕개념을 이번에는 카이사르라는 황제개념과 대립시키고 있다. 카이사르라는 라틴어는 황제라는 뜻이며 그리스어로 바실레우스인데 바실레우스는 왕이란 뜻이다.
그들은 교묘한 논리맞춤으로 예수가 메시아라고 한 말을 카이사르에 까지 빗대어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카이사르의 친구」가 아니라는 말은 빌라도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 「카이사르의 친구」라는 호칭은 로마제국시대에서는 황제의 충복이라는 뜻으로 공무원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은 말이었다. 카이사르의 친구가 아니라는 낙인은 황제의 배반자를 뜻했고 죽음을 뜻했다.
빌라도가 로마당국에 줄을 대고 있던 사람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총아로서 전권을 휘두르던 포악하고 부패의 대명사인 엘리우스 세야누스였다. 그는 결국 같은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기원31년 10월 18일). 그러니 로마에 뒷줄을 잃어버린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위협을 무시할 수가 없었고 어찌할 수 없이 그들에게 아첨해야 했다. 아우스뚜스 황제가 반포한 대역죄법(lex Julia majestatis)은 자못 준엄하였다. 왕칭호에 대한 로마 군인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사도행전에도 나타나 있다(사도17, 7).
빌라도는 지금 진리수호와 자기 지위보전이라는 두 갈래 길에 서게 되었고 모든 세속 권력자들의 뻔한 길을 그는 택하였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예수를 다시 데리고 나와 그리스어로 리토스트로토스, 히브리어로 가빠타라고 하는 돌을 깐 높은 자리에 있는 재판석에 앉혔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둘러보며 「자, 여기 당신들의 왕이 있소」라고 팽개치는 듯 말하였다.
그들은 「없애 버려, 없애 버려」라고 일제히 외쳤다. 빌라도는 「당신들의 왕을 죽이라는 거요」라고 또 빈정댔다. 대제관들은 「우리의 왕은 카이사르뿐이오」라고 대답하였다. 때는 과월절 희생양을 잡는 시간 6시(정오)였다(요한19, 14). 이 시간은 예수의 십자가형 집행시간을 아침 9시라고 한 마르꼬복음서와 맞지 않는다(마르15, 25). 요한과 마르꼬의 시간표시는 전례적인 뜻이 있다. 요한은 예수의 사형확정 시간을 유대인들의 희생양 잡는 정오와 맞추었고 마르꼬느 아모스서의 「캄캄한 한낮」(아모8, 9)을 예수의 죽음전 12시의 어두움과 맞추고 사형집행시간을 조정하였다(대목 357참조). 다른 해석은 숫자를 문자로 표시했던 당시 관습을 감안할 때 요한 복음서의 12시는 당시시간 6시이고 시그마(∑=6)로 표시되며 아침 9시는 당시 시간 3시로서의 감마(I'=3)로 표시되어 수기과정에서 ∑와 I'가 혼돈되었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당신외에 다른 주님을 모르며 당신이름만을 부르옵니다」(이사26, 13) 라고 외치던 자들이 오늘 주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죽이려고 자기들의 점령군의 우두머리를 자기들의 왕이라고 부르짖고 있다. 한편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을 때에 그의 아내가 전갈을 보내어 빌라도에게 그 의로운 사람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하며 간밤에 예수의 일로 꿈자리가 사나웠다고 전했다. 후대 사람들은 이 여자의 이름을 프로쿨라 클라우디아(Procula Claudia)라고 하였고 그리스정교회와 이디오피아 교회에서는 성녀로 존경하기도 한다.
빌라도는 심리적으로 몹시 흔들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 소득이 없었음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군중의 소동도 심상치 않아 보였으므로 물을 가져 오라고 하여 군중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 흘림에 대하여 아무 책임이 없소. 그 책임은 당신들이 지시오」라고 말하였다. 빌라도가 손을 씻은 것은 신에 대한 부당한 행동으로 야기될 신이 복수를 면하기 위한 미신행위였다.
온백성은 「그 죄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자손들이 지겠습니다」라고 소리질렀다. 빌라도는 민중을 만족시키려고 그들의 요구대로 반란죄와 살인죄로 감옥에 가두었던 바라빠를 석방하고 예수를 그들 마음대로 넘겨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미 매질을 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그들에게 내어 주었다. 그들은 예수를 조롱한 다음 진홍색 망토를 벗기고 다시 예수의 옷으로 갈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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