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왜 사회문제에 참여하는가. 인권과 정의구현, 민주화를 위한 교회의 활동들은 어떤 교회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70~80년대 군사 독재정권하에서의 교회 사회 참여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11월 23일 오후 1시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소장=금장태 교수) 주최로 열린 강연회를 통해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고 70~80년대, 그리고 89년 6.29 항쟁시기까지 교회가 노동자 농민들의 인권회복ㆍ민주화를 위해 나서지 않을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털어놨다. 공개강좌를 통해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가 그 중심에 있었던 교회 수장을 통해 알려진 것은 처음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또한 많은 시국문제를 접했지만 「5.18 광주항쟁 때가 가장 마음으로 괴로웠던 시기」라고 표명하는 등 5.18, 80년 서울의 봄 등 격동기 역사속의 굵직한 사건들의 비화를 담담하게 소개,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했다.
이날 강연회는「교회는 왜 사회 참여를 하였는가? - 70~80년대 군사 정권하에서」란 제목으로 열렸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근대 한국사회 흐름속에서 인권과 정의구현, 민주화를 위해 교회가 구심점이 돼 펼쳤던 활동들을 밝히면서 「교회의 사회참여 근본이유는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못박았다.
「성경에 의거할때 그리스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는 인간이며 즉 인간은 그리스도의 길」이라고 강조한 김추기경은「인간의 구원자라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에서처럼 인간은 예외없이 그리스도에게 일치된다」면서「때문에 인간은 교회의 길이고 이것이 교회가 사회에 참여하는 근본적 이유」라고 역설했다.
김추기경은 이 자리서 노씨 비자금 문제와 관련 「비자금 조사는 철두철미하게 끝까지 정의롭게 이루어져야 할것」이라며 「그래서 법이 살아있고 정의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고 그때에야 비로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5.18 당시 군병력의 투입을 막기위해 개인적으로 동분서주 했던 바를 들려준 김추기경은 「내가 할수 있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무척 고뇌에 빠졌었다」면서 교황대사를 통한 미국측과의 연락, 사태악화 방지를 위해 전두환씨를 찾았던 일 등을 소상히 전했다. 김추기경은 그러나 이때 문제에 적극 개입하지 못해 해결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회고.
김추기경은 이에 앞서 12.12사태후 전두환씨의 방문을 받았던 바를 술회하면서 「그 이듬해 세배차 찾아왔던 전씨에게 어려운 시국을 맞고 있는 상황에서 계엄사령관을 그런식으로 체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너무 솔직하게 말했고 이에 대해 전씨는 무척 섭섭해 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들었다고 언급. 이후 그 측근들이 계속해서 찾아왔으나 야단을 쳐서 보냈고 어느 경우는 울고 가기도 했다고 김추기경은 들려줬다.
3공시절 민청학련 사건과 연루돼 고 지학순 주교가 구속됐을때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만났던 일을 밝힌 김추기경은 「당시 박대통령은 교회의 역할, 언론자유 노동문제를 문제삼아 교회가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고 말했다. 김추기경은 「이때의 대화가 대통령들과의 대화중 가장 대화다웠다」며 「교회가 윤리적 도덕적 측면의 파수꾼이 되어야 하며 정치 경제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를 설명했다」고 공개했다.
또한 김추기경은 「언론자유는 정부에 대한 신뢰와 연결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정부가 권력으로 언론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오히려 국가 안보를 해치는 것」이라는 내용을 전했다고.
강연후 토론 과정에서 현재 교회가 빛과 소금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김추기경은 「눈으로 뚜렷이 드러날만큼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고 얘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한 김추기경은 「교회안에는 그런 삶을 사는 분들도 제법있다」면서 「전체교회는 바티칸공의회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거울삼아 늘 쇄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연 요약
61년 5.16 쿠데타부터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까지 30여년을 흔히 군사정권시대라고 말합니다. 이 시기는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경제발전을 이룩한 때 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오늘날 많은 이의 기억속에 아픔으로 남아있을만큼 독재정권의 압제가 격심하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막강한 권력에 의한 강요된 희생이었고 많은 경우 불필요할 뿐 아니라 부당하고 불법적이기까지 한 인권유린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국민의 참여의욕을 감소시켰고 특히 인권유린과 사회정의 부재는 너무나 많은 이의 삶을 고통속에 좌절하게 하였고 권력형 부정부패를 만연시켰습니다. 최근의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도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인권과 사회 정의문제는 70년대부터 87년 6.29선언까지 근 20년동안 가장 심각했었다고 생각합니다. 70년 10월에 있었던 노동자 전태일군 분신자살 사건은 당시의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었고 김지하 시인의 「오적」시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72년 10월 17일 10월유신 선포와 유신 헌법 제정, 74년 1월 대통령의 긴급조치령 발동은 힘의 통치, 공포 통치를 자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가운데 수많은 인권유린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저항하는 인권수호와 사회정의를 외치는 소리가 대학, 언론계, 노동계, 재야 정치인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을 존중하고 극히 제한된 경우외에는 되도록 현실 정치 참여를 피했던 보수성향의 가톨릭교회도 인권과 사회제정의 구현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1967년 강화도 삼도직물사건은 교회가 예민한 사회문제에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힌 사례입니다. 전형적인 노동운동 탄압이었던 이 사건은 임시 주교회의를 소집하게 했고 68년 2월 9일부로 공식 성명을 발표하게 했습니다.
그후 71년 10월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와 교구 사제 전원의 정부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시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역사상 첫 성직자 시위였습니다.
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사건에 연루, 구속된 사건은 가톨릭 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인권과 사회 정의구현에 참여하게된 결정적인 동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정의구현 사제단이 자발적으로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이후부터 더 많은 시국문제나 사건들에 교회가 함께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시국기도회도 자주 열렸습니다. 천주교회가 인권과 정의구현,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한 구심점처럼 비춰지게 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입니다.
특히 76년 3월 1일 초교파적으로 열린 명동 3.1절 기도회는 이른바 「민주 구국선언」을 발표하였고 이로써 한국 민주화운동은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게 됐습니다.
79년 10.26사태로 박정희시대가 끝나고 12.12와 80년 5.18광주 민주화 운동강경 진압으로 등장한 신군부 집권시대에도 인권, 사회정의, 노동자 농민 도시 철거민들을 위한 교회노력은 계속됐습니다. 그중 최기식 신부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관련 구속되는 고문치사 사건은 민주화 운동의 불을 다시 당겼습니다. 이힘이 6.10 항거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최기식 신부의 구속사건 당시 최신부는 피의자들을 권유하여 당국에 자수케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모든 매스컴을 동원하여 약 1주일간 가톨릭 교회가 마치 좌익 반국가 범죄의 소굴인양 인상을 갖도록 오도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럽다 할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강력히 이에 대응하여 항의하였으나 언론에서는 이것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70년대에서 87년 6.29선언에 이르는 동안 교회는 인권과 사회정의 이땅의 민주화를 위해 깊이 참여함은 물론 선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때 개인적으로는 교회내외에서 격려와 함께 많은 반대와 비판을 받으며 너무나 괴롭고 고독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심적 고충은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참으로 단순하지 않았고 어찌할바를 모르는 암담한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가 이렇게 깊이 정치문제에 개입하느냐」「공직에 있는 가톨릭 신자들의 고충은 얼마나 큰지 아느냐」등등… 이럴때 외람되지만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가끔 생각했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 앞에서의 기도로 지탱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교회가 현실 참여를 하게된 이유는 1960~65년까지 있은 가톨릭 교회 최고 종교회의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있습니다. 이 공의회의 정신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교회는 비록 그 기원이 세상에 있지 않다 할지라도 세상 안에, 세상을 위해서 즉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있고 따라서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발표된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은 이러한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과 인간의 모든 문제, 특히 가난과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의 문제에서 그리스도인은 결코 무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마치 자신의 문제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참여의 근원적 이유는 결국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 자연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모든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때문에 이 인간은 정치 경제의 주체여야 합니다. 결코 그 객체나 도구로 전략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사랑속에 살며 서로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인류가 모든 차별을 넘어 하나의 사랑의 공동체 인류 가족을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런 인간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삶의 목적 존엄성에 위배되는 반 인간적 반 인륜적인 모든 것을 배척합니다. 교회가 인간의 기본 권리와 사회정의를 위해 나름대로 희생을 치러가면서 노력하는 근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곧 인간이요, 인간은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교회의 길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회참여의 근본적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바로 이러한 인간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난 20여년간 물질적 발전은 크게 있었음에도 인간 발전은 거의 제자리 걸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물질에 사로 잡혔는가?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서도 잘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미래는 어디서 찾을 것인지 함께 생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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