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형은 고대 페니키아, 페르시아에서 실행되었고 로마인들이 이 형벌제도를 도입하여 노예나 외국인들의 범죄를 처벌하는데 사용하였다. 예수의 십자가형과 베드로의 경우도 로마의 사법처리의 일환으로 이루어졌고 사도 바오로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십자가형에 처해지지 않았다. 팔레스티나에서는 강도, 사회적 폭동, 반란죄를 처벌하는데 십자가형을 사용하였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그 책임을 로마인들에게 전가 시키려고 로마황제에 대한 대역죄로 몰아 로마총독의 손으로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압력을 넣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우유부단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손에 놀아나고 말았다.
예수의 유죄가 확정된후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임무를 맡은 로마 병사들은 예수를 성문 밖으로 끌고 나왔다. 십자가형장인 골고타 언덕으로 끌고 가려는 것이었다. 죄인은 형장까지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 나무를 스스로 지고 가야 했다. 십자가는 十자형 모형과 T자형 모형이 사용되었는데 예수의 경우는 성 아우구스띠노가 주장한 이래로 예수의 십자가를 十자형으로 통용하고 있다.
하여튼 지난 밤동안 밤새껏 여기 저기 끌려 다니며 고막이 터지는 소란속에서 끝도 없는 심문을 당하고 끝내는 매질과 온갖 모욕행위로 기진맥진한 예수는 더 이상 십자나무를 매고 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매고 갔는지는 알수 없으나 나무 무게에 눌려 땅에 엎어지곤 하였다. 병사들은 예수가 십자나무를 지고 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옆에 지나가던 시몬이라는 사람을 징발하여 십자가를 대신 지도록 하였다.
시몬은 영문도 모르고 이 치욕스러운 형벌에 한몫을 하게 되었는데 점령군의 병사들이 식민지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루는 광경으로 볼 수 있으나 복음서는 그러한 관점보다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겪었다는 관점에서 이 기사를 썼다고 볼 수 있다. 시몬은 북 아프리카의 리비야 키레네 사람이며 키레네는 기원전 4세기부터 그리스어를 말하는 이산(離散)유대인들이 본거지로 하고 있는 도시였고 이 이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그들의 회당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사도6,9). 사도 교회시대에 키레네의 유대인들이 사도들과 접촉이 있었으며(사도2,10: 13,1)안티오키아 교회가 세워지면서 키레네 출신 유대인들이 많이 입교하였다(사도11,20). 오늘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은 농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이 날은 오전까지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과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에 상경했거나 늙어서 이 곳에 이주해 왔을것이다.
시몬에 대한 여타의 문헌이 없지만 전설에 따르면 후에 아라비아 보스라의 주교였고 순교자였다고 전한다. 그의 두 아들 알렉산델과 루포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 없지만 복음서가 쓰여지던 시대에 신자들에게 알려진 신자였을 것이다.
예수의 처형 소문은 삽시간에 시내에 퍼졌고 그동안 예수의 말씀을 들으며 따르던 사람들은 급히 달려와 십자가의 길을 따르며 애통해 했다. 그중에는 가슴을 치며 예수의 죽음에 곡을 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이 여자들의 이름은 갈바리아산 십자가 밑에서 다시 소개 되겠지만 그 동안 예수를 따라 다니며 시중들던 여자들로 후대에 「예루살렘의 경건한 부인들」로 알려져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앞으로 예루살렘이 겪을 재앙을 내다 보시며 이 여인들에게 닥칠 불행을 미리 알려 주시려고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예루살렘)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라고 말씀하셨다. 기원 70년 예루살렘 멸망때 그 안에사는 사람들을 돌보시며 하신 말씀이다.
예루살렘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마태 23,37~38). 그 때가 되면 사람들 위에 산이 무너지고 언덕이 동네를 무너트려 뒤덮게 된다는 호세아 예언서의 예언이 이루어 질것이다(호세 10,8). 억장이 여인들의 고통은 말이 아닐 것이다. 특히 젖먹이가 딸린 여자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자식을 자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불행의 극치이다. 예루살렘의 죄악이 저지른 결과이다. 「생 나무가 이런 일을 당하거늘 마른 나무야 오죽하겠는냐」는 마지막 말씀은 여러가지 해석을 낳았다.
생나무는 예수를 가리키고 마른 나무는 불신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데「내가 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죄많은 저들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게 되겠느냐」는 뜻으로 해석하는 설과 생나무는 예수를, 마른 나무는 신앙이 아직 약한 신자들을 가리켜서 마른 나무가 불타듯 새 신자들이 당할 박해를 예고하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설이 있다.
예수의 십자가 길에는 다른 두 사람도 함께 끌려가고 있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