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이 11월 24일 5ㆍ18특별법을 제정하기로 함에 따라 지난 80년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한 비극으로 손꼽히는 5ㆍ18광주 민주화운동은 마침내 해결의 역사적 전기를 맞게 됐다.
특별법이 어떤 모습을 띠게 될는지는 두고 볼 일이며 또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결단의 이면에서 또 다른 정치적 의미를 발하고자 하는 의견도 있으며 사실상 이는 우려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쨌든 전 국민은 이구동성으로 「환영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교회 안에서도 역시 정의가 화해와 사랑의 선행 조건이라는 면에서 5ㆍ18 광주민주화운동과 교회는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그 당시부터 최근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까지를 살본다.
「참여」와 「침묵」의 갈등 속에서 혹은 예언자적 소명으로 정의를 외치고 혹은 움츠러들기도 했던 교회의 모습은 그러나 5ㆍ18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부분적으로나마 그 아픔에 동참해왔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특별법의 제정으로 이제 사법적 해결의 대상으로 나타날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은 가톨릭교회에 있어서도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교회의 사명에 비추어 적극적인 해결 노력을 요청한 시대적 과제였다.
당시 계엄군으로 진압을 책임지고 있던 당사자들이 정치권의 최고권자로 자리 잡고 있던 5공과 6공시기에 5ㆍ18에 대한 이야기는 논의의 주제로조차 삼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국회 「광주문제진상조사특위」가 88년 11월부터 89년 2월까지 관련자들을 소환, 여섯 차례에 걸쳐 청문회를 개최하면서부터 5ㆍ18의 진상규명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왔다. 90년 7월에는 광주보상법이 제정됐다.
소위 문민정부가 출범한 93년 5월 5ㆍ18피해자 3백22명은 전두환, 노태우씨 등 35명을 내란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이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검찰은 지난 7월 18일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려 5ㆍ18문제는 다시 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이 결정은 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적인 운동을 촉발시켰다. 이날 광주와 전남지역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5ㆍ18학살자 기소관철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고 19일부터는 서울 명동성당에서 5월 단체 회원 10여명이 밤샘농성에 들어가는 등 전국에서 특별법 제정과 특별 검사제 도입을 요구하는 시위와 농성, 집회가 이어졌다.
교회는 전국적인 이런 움직임과 함께 특별법 제정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벌였다. 지난 9월 18일 사제, 수사, 수녀, 평신도 등 모두 12만3천4백64명의 서명을 받은 서명부를 국회에 제출했고 11월 17일부터는 사제 10여명이 특별법제정을 촉구하며 명동성당에서 일주일간 단식기도를 하기도 했다.
14개 교구 4백52개 성당과 1백20여개 수도회, 병원 등에서 받은 이 서명은 그 후로도 계속 늘어나 특별법 제정이 기대는 현재 서명자는 수도자 5천5백4명, 평신도가 12만 7천7백19명으로 모두 13만3천2백23명에 달한다. 특별법 제정을 우한 투쟁은 역대 어느 시민운동보다 지속적이고 폭넓게 전개돼왔고 교회는 그 운동의 일정 부분을 담당했던 것이다.
80년 5월 광주의 참극, 그리고 그에 따른 일련의 과정에서 교회는 특히 중요한 부분을 맡았다.
사실 70년대 정의와 인권을 위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아왔던 교회에게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은 큰 충격이었으며 80년대 사회문제에의 참여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한 사건이었다.
80년 당시 위기상황이 우려되는 어수선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닥쳐올 파국을 우려한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5월 9일 「시국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은 주교단이 정부에 대해 민주헌정 확립과 정권이양실현 및 불의와 부정에 타협한 인사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국민에 대해서도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겨레와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일할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시국은 주교단의 이런 당부에도 불구하고 악화돼 계엄령 해제 및 민주화를 요구하는 당시 계엄당국은 이에 맞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및 각 대학의 휴교조치 등으로 강경 대응했다.
이런 살얼음판의 정국속에서 5ㆍ18이 발생했다. 시민군과 총격전까지 벌이면서 숱한 희생자를 낸 이 사건에 대해 교회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다.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5월 23일과 24일 사목교서를 각각 발표, 사태의 이성적 수습과 화해를 호소하는 한편 전국의 신자들에게 광주를 위한 특별 기도를 요청했다.
하지만 일련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악화도니 정국에 대해 교회는 사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 「5ㆍ18사태 수습위원회」를 구성, 김성용 신부(당시 광주가톨릭대교수) 등이 가톨릭측 대표로 참여해 사태수습의 전면에 나선다.
수습위 대변인 김성용 신부 등 수습위원은 △계엄군의 시가 진입 금지 △계엄군의 지나친 진압 인정 △연행자 석방 △사실보도 촉구 △보복 금지 등 8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사태의 평화적 수습을 모색하는 한편 시민들이 소지한 총기반납을 서둘렀다.
하지만 계엄당국과의 담판을 위해 사태 발생 9일째인 5월 26일 수습대책위원회들과 죽음을 각오하고 「죽음의 행진」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결국 5월 27일 무력진압으로 인해 광주민주화운동은 참혹한 모습으로 끝이 났다.
이런 일련의 상황 속에서 교회는 무엇보다도 아픔을 함께 하며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광주대교구는 구호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부상자의 치료에 전력을 다하는 한편, 모든 정당이 해산되고 모든 정치적 발언이 금지된 삼엄한 사태 분위기 속에서도 광주교구 사제단은 「광주사태의 진상」이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군의 과잉진압을 규탄했다.
또 윤공희 대주교는 5월 26일과 6월 2일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태수습을 위해 노력해온 수습위원을 포함한 연행된 시민, 학생들의 석방과 진실규명을 통한 사태의 진정하고 항국적인 수습』을 요청했다. 그는 또 아울러 김추기경, 김남수 주교, 나길모주교, 정진석 주교 등 역시 연명으로 최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사태수습을 촉구했다.
한편 계엄사령부 수사당국은 7월 12일 광주민주항쟁과 관련 허위사실을 유인물로 만들어 교계와 일반 시민에게 배포한 혐의로 당시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오태순 신부를 비롯해 양홍, 김택암 신부 등 7명을 연행, 조사하기도 했다. 또 함세웅, 김승훈 신부는 이에 앞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이후 포고령 위반 혐의 등으로 조사받고 풀려난 바 있다.
수습위원으로 사태해결에 만전을 기했던 김성용, 조쳘현 신부는 이후 징역 15년과 6년형을 각각 언도받았다.
이처럼 일련의 비극적인 사태를 겪으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족최대의 비극이고 이에 대한 실체적 진상 규명을 통한 참된 문제 해결과 화합이 우리사회의 당면과제라는 것을 교회는 새삼 깨닫다.
광주대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의 각 교구는 80년 이후 해마다 5ㆍ18과 관련한 추모미사를 봉헌하고 진상규명, 책임자 문책, 사상자에 대한 보상과 치료를 통한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요구해왔다.
실제로 모든 사회세력이 광주문제에 대해 언급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숨죽여 있던 어려운 시절인 81년 5월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광주사태 1주기를 맞는 우리의 주장」이란 성명서를 통해 『5ㆍ18광주사태는 불순분자의 책동을 받아 일어난 폭동이나 내란이 아닌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물리적 폭력에 항거해 일어난 80만 광주 시민의 자발적 민중의거』라고 성격을 규정한다. 또 84년 5월에도 『광주의거 진상이 밝혀지고 그 책임소재가 분명히 물어질 때 진실을 바탕으로 한 민족적 화해와 일치가 있을 수 있음을 거듭 촉구한다』고 밝혔다.
광주민중항쟁은 올해로 15주기 지냈다. 비극의 현장인 광주교구 정평위는 그동안 5ㆍ18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있어 다른 어떤 시민단체나 인권단체보다도 큰 기여를 해왔다.
87년도에는 전국에서 최초로 광주민중항쟁 사진전을 열어 당시의 참혹했던 장면들을 낱낱이 고발했고 90년에는 10주기를 맞아 판화전을 열었다. 해마다 5월이면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규명되지 않은 광주 민중의 아픔에 동참했다.
이제 5ㆍ18 특별법의 제정은 어떤 식으로든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해결을 위한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특별법의 제정 자체가 또 다른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고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비극을 정의롭게 해결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의 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특별법의 제정과 시행에 또 다른 불순한 의도가 깃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국민들의 뜻이다.
◆교회활동 연혁(주요내용)
▲87년-광주 민주화운동 사진전 전국 순회
▲90년-광주 민주화운동 판화전 전국 순회
▲90년 7월-국회 「광주 보상법」제정
▲95년 7월 18일-검찰 「공소권 없음」결정
▲95년 9월 18일-12만3천4백64명 특별법 제정요구 서명, 국회 제출
▲95년 11월 17일-사제 10명 단식기도
▲현 특별법 제정 촉구 서명자수 13만3천2백23명
▲민주화운동이후 해마다 시국미사 봉헌, 성명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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