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12월 8일자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30주년을 맞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1962년 10월 11일 개막, 65년 12월 8일 폐막 때까지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 두 교황의 주도 아래 3년 2개월여간 네 차례 회기로 진행됐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전례」「교회」「계시」「사목」에 관한 4개 헌장과 「매스미디어」「일치운동」「동방교회」「주교 사목직」「수도 생활의 쇄신과 적용」「사제의 직무와 생활」등 9개 교령, 「비그리스도교」「그리스도교적 교육」「종교의 자유」에 관한 3개 선언을 공의회 문헌으로 발표했다.
가톨릭신문은 교회 언론으로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회기 동안 진행되는 과정을 유일하게 지면을 통해 한국교회와 사회에 상보했고, 당시 본보 사장신부로 재직 중이던 김수환 추기경은 신자들에게 공의회 결정 사항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 공의회 해설기사를 직접 작성 게재하는 사목적 열의를 보여주었다.
가톨릭신문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30주년을 맞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중요성과 교회사적 의미, 공의회 과정,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 공의회 정신 구현을 위한 한국 교회의 쇄신 방향 등을 살펴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서 「제3천년기」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전의 다른 공의회들과 유사하면서도 반면에 대단히 다른 공의회이기도 하다』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의 신비에 초점을 맞추면서 동시에 세계를 향하여 열린 공의회였다』고 정의했다(18항참조).
금세기 최고의 신학자 칼 라너(K. Rahner)역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두고 『교회의 본질에 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향』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근원적으로 이해하도록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공의회이다.
신학자들은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교회생활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 『그리스도인 생활의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간주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지역교회에서도 교회의 본질을 찾아볼 수 있게 됐고, 이 공의회를 통해 교회와 각 문화ㆍ사상ㆍ종교, 그리고 모든 인간과의 만남이 가능하게 됐기 때문이다.
광주 가톨릭대학 교수 이제민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교회의 사목현장 반성」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를 거의 2천년에 가까운 서구 유럽적 교회의 틀을 벗고 세계 중심적 교회로 이해하게 한 획기적 사건』이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평하고 있다.
교황을 비롯해 금세기 모든 신학자들과 사목자들이 「획기적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핵심적 교의(敎義)는 「하느님 백성」과 「교회의 성사성」 그리고 「교회일치 운동」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가 하느님 백성」임을 정의해, 「위로부터의 교회론」에 제동을 걸고, 평신도로 하여금 그들 각자가 교회임을 의식하도록 해준 「아래로부터의 교회론」을 탄생시켰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또 「교회를 성사」로 정의내리면서 「교회가 구원의 표지」임을 드러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장려하고 각 문화를 존중하면서 복음화와 토착화를 강조, 교회를 세계 문화에로 개방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과거의 공의회와는 달리, 어떤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보다 미래지향적으로 방향을 제시하고, 대화를 통해 공동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하려는 공의회였다는 점이다.
아울러 교회가 이 시대의 적합한 복음 선포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제일 먼저 스스로를 반성하는데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회개와 쇄신」의 공의회로 불리우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은 세계 교회뿐 아니라 한국 교회에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막대하게 미치고 있다.
각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토착화 과정은 각 지역교회가 얼마만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근본정신을 수요하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한국 교회는 질적ㆍ양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공의회가 제시한 변화와 개혁을 수하는데 적극적으로 노력해왔다.
이 같은 자세에 대해 신학자들은 「한국 교회가 교황청에 대한 거부적 역사 전통이 없었을 뿐 아니라 대부분 신자들의 짧은 신앙적 경륜 때문에 적극적인 수용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고 나름대로 평하고 있다.
우선 양적인 측면에서 한국 교회는 공의회 폐막 당시 67만 명에 불과하던 신자수가 94년도엔 3백30여만 명으로 약 5배가 늘었고, 교구도 10개에서 15개로, 본당도 3백13개에서 9백75개로, 10명의 주교가 20명으로, 6백24명의 사제수가 2천3백6명으로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국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헌장의 정신에 따라 라틴어로 집전되던 미사와 칠성사 모두가 우리말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모국어 사용뿐 아니라 남녀 신자들에게 독서낭독과 신자들의 기도에 참여하도록 허용, 전례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했다.
또 토착화 정신을 전례에 도입, 교황청의 승인 하에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는 대신 깊이 숙여 절하고, 제대와 성서에 친구하는 대신 머리 숙여 절하며, 평화의 인사때 목례와 함께 「진심으로 축복합니다」라는 말로 대치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과 평신도 교령에서 사회 참여에 대한 신학적 당위성을 찾은 한국 교회는 1960년 후반부터 끊임없는 민주화 운동과 사회 참여를 실시해 왔을 뿐 아니라 90년대에 들어서는 남북 분단의 현실을 더욱 깊이 인식하고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사회참여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 일치운동을 그대로 수용한 한국 교회는 또한 세계최초로 개신교와 함께 펴낸 「신구약 공동번역성서」를 발간, 공의회 정신을 구현하는 가장 모범적인 지역교회로서의 위상을 만방에 과시하기도 했다.
계시헌장의 영향으로 한국 교회 내에 다양한 성서공부가 시행되고 있고 MBW, 꾸르실료, 성령쇄신 등 새로운 신심운동이 전래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한국 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교회 쇄신이란 새로운 물결을 타고 들어온 다양한 신심운동들은 「예수성심」「성체신심」「성모신심」과 같은 전통적 신심운동을 퇴색케 했을 뿐 아니라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관련한 신학 교재부족, 교리서의 졸속한 개편과 신자들의 자의적 성서해석으로 신자 교육과 사제양성에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신학자들은 공의회가 폐막된 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 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 교회가 「쇄신」의 새로운 물결 속에서 공의회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다고 진단한다.
신학자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아래서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선 신앙생활의 토착화를 통한 한국적 신학의 정립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