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일은 교회가 인권주일을 시행한지 열네번째가 되는 날이다. 본지는 인권주일을 맞아 세상을 떠난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절망의 생명을 어루만지던 대부」로 한국 법조계 사표로 남아있는 김홍섭 판사의 삶과 최근 선종한 고 김성일 서울고등법원장의 삶을 살펴본다.
요즘 국민들의 눈과 귀를 모으고 있는 전직 대통령들과 관련된 비리들이 「법은 영원히 살아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현실에서 법조인의 기둥으로, 청렴한 법관으로 교훈을 남긴 두 신앙인의 삶은 인권주일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이와함께 본지는 열악한 인식부재 하에서 인권침해와 관련된 법률구조활동과 장기수 양심수 후원사업 등을 벌이고 있는 천주교 인권위원회 위원장 김형태 변호사를 만나 교회와 인권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사형수의 아버지 「사도법관」고(故) 김홍섭 판사
성의걸친 법관… 「인간애의 표상」
법복안에 성의(聖衣)를 입은 법관, 사랑과 청빈의 진인(眞人) 등으로 불리며 3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법조계의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혀온 고 김홍섭 판사(바오로).
사도(使徒) 법관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그의 고결했던 삶은 인권주일을 맞는 현대인들에게 사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한국 법조계에 신화적인 인물로까지 평가받고 있는 김판사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바로 그가 그대로 살았던 청빈의 삶일 것이다. 그는 청빈을 법관의 일관된 신조로 삼아 장인인 김준연 선생이 물려준 양복저고리에 항상 단무지만이 든 도시락을 끼고 걸어서 출퇴근할 정도로 가난을 몸소 실천했던 법관이었다.
또한 그는 교회에선 「사도법관」으로 알려질 만큼 가톨릭적 신앙의 바탕위에서 한평생을 살았다. 특히 사형수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사형수를 대자로 맞는 등 사형수교화에 각별한 관심을 쏟은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가 작고한 이후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헤아려봐도 그가 얼마만큼 위대한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사도법관」을 비롯 「한국 법조인의 기둥」「절망의 생명을 어루만지던 대부」「비범한 가톨릭적 행자」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식어가 그의 삶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한 혹자는 그를 가리켜「사법부의 전통위에 거목과도 같이 우람했던 사람」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왜 그가 이토록 거대한 인물로 아직까지도 평가받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고 김홍섭 판사는 법관이기 이전에 따스한 가슴을 가진 참 신앙인이었다. 현직 법관의 신분으 로서 교도소의 사형수를 찾아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해 수많은 사형수들을 대자로 받아들인 그의 삶만 보더라도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세상이 외면한 중죄인에게까지 자애로운 숨결을 쏟아 진실로 참회하고 새 사람되게 인도했던 생전의 김판사의 면면은 수없이 많다.
충격적이었던 「경주호」납북 미수사건 공판 당시 법정에서 김판사가 남긴 『불행히 세계관을 달리하여 여러분과 나는 자리를 달리하는 것입니다』. 재판장으로서 극형을 선고하고 그는 머리를 숙인 채 묵념한 다음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면 어느 편이 죄인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불행히 이 사람이 능력이 부족하여…』라는 말의 의미는 「인권주일」을 맞는 오늘의 법조인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큰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인간의 권리에 대해 깊은 묵상을 해봄직한「인권주일」. 사법부의 독립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요즘 시국에서 김판사의 강직했던 사도적 삶은 후배 법조인들과 우리모두에게 큰 용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소박한 선비」고(故) 김성일 서울고등법원장
예수님처럼 피고를 대한 참신앙인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몸으로 살다 지난 10월 31일 집무도중 뇌출혈로 쓰러진 지 5일만에 숨을 거두어 세인들의 안타까움을 샀던 고 김성일(바오로) 서울고등법원장. 한국의 사법부에서는 최초로 순직을 인정받아 국립묘지 유공자묘역에 안장돼 화제를 낳았던 그의 신비적인 삶은 인권주일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삶의 표본을 제시해주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바로 고 김원장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을 대변하는 말이다. 정도(正道)를 걸으며 청렴하고 꼿꼿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김원장이 판사 생활33년 동안 모은 재산은 아파트 한 채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고향의 임야가 전부였을 정도.
또한 그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찾아오는 사람을 거부한 것이 없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권위의 상징인 고등법원장을 지내면서도 그는 소박한 선비의 모습을 지키며 살았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다.
그는 권위적인 들어서면 판사가 아니었다. 항상 재판장에 들어서면 피고들을 향해 큰 절을 올릴 정도로 피고인의 편에 서서 사건처리를 해왔다고 한다.
김원장이 사후 남긴 메모에는 이런 글귀가 실려있었다. 자신의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통제할 「십계명」과 같은 짧은 글에는 「피고인을 대할 때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하듯 할 것」「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 나도 피고인을 사랑할 것」이란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그가 사랑으로「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기 위해 얼마큼 노력했나 알 수 있는 글이다.
피고 위에 군림하기보다 피고가 왜 죄를 지어야만 했나를 생각하고 함께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판결을 내렸던 그는 그렇기 때문에 그를 아는 이들이 그를「참신앙인」이었다고 주저없이 평하는지도 모른다.
이밖에도 법조인으로서 실천한 사랑과 나눔의 일화는 이루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다.
김원장은 매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 두시간 정도의 아침기도를 선종하는 날 아침까지도 바쳤다고 한다. 또 그는 생전에 산청나환우돕기회인 「미라회」회장으로 일년에 두번 산청에 직접 내려가 나환우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비행청소년들을 선도하기 위해 지난 77년 신자 법조인들과 함께 경기도 광주에 「연성원」을 지어 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도 하는 등 사법부는 물론 이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이었다.
법원 행정처 차장 재직시 법관인사위원회를 설치해 법관인사제도 개선에 기여했으며, 한글전용판결문 간소화를 최초로 시도하는 등 법원 업무개선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한다. 대법원은 그의 영결식날인 11월 3일 그에게 1급 청조근정훈장을 추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 고인의 업적을 치하하는 최고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천주교 인권위원장 김형태 변호사
“이웃사랑이 곧 인권운동”
“광주「5ㆍ18」문제는 구속력 지닌 규범으로서 헌법 기능상실의 한 예”
서울 강남역 인근 덕수 합동법률사무소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김형태 변호사(사도요한ㆍ40ㆍ 이문동본당). 85년경부터 고 황인철 변호사 등과 함께 교회내외의 수많은 인권관련 법률 구조사업에 참여했던 그는 『인권이라면 정치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경우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다』고 밝히고 『인권운동이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인권과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은 둘이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나의 구원에만 정성을 쏟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사랑은 나를 버리고 주위에 있는 모든 이웃들에게 쏟는 관심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인권보호와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김변호사는 우리 사회의 인권 정의문제가 달려있다는 점에서 현재 가장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5ㆍ18문제가 바르게 처리됐으면 한다고 제14회 인권주일 소감을 밝혔다.
인권주일이 매년 공지되고 담화문등이 발표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연례 행사에 그치고 마는 느낌이 없지 않다고 말한 그는 교회적 의미의 인권과 그 중요성을 교육하고 현실을 점검 하는등의 노력이 최소한 필요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한 이해와 관심 미비는 바로 인권에 대한 편협된 생각을 낳게 된다고 김변호사는 전언. 「인권운동은 정치와 관련된 특정한 이들만이 하는 것」이라는 경향들이 바로 그러한 이해부족에서 나온 것이라며 복음말씀을 비롯 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은 인권과 연결 된다고 역설했다.
현재 인권위원회에서 벌이고 있는 사업들은 인권 법률상담소 운영, 법률구조사업, 구속자 후원사업, 연대사업, 인권교육, 조작간첩 진상규명 대책활동 등이다.
최근까지 조작간첩 진상규명 대책활동에 주력, 관련 비디오를 제작하기도 했던 인권 위원회는 앞으로 인권교육 등에 힘쓰면서 인권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작업을 할 계획이다.
85년경부터 인권위원회와 연계를 가지고 위원회 일을 함께 해 온 그는 지난 93년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산하 조직에서 「천주교 인권위원회」로 독자적 명칭 사용이 결정된 후 첫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현재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 일을 맡고 있으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창립 멤버이기도 한 김변호사. 한국의 법현실을 「법따로 현실따로」현상이라고 지적하고 상위 개념으로서의 헌법이 구체적 구속력을 지닌 규범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들려줬다. 5ㆍ18문제는 바로 그러한 예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그러나 한편 김변호사는 그러한 현상은 시간이 흐르고 법조계의 연륜이 쌓아지면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