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나그네에게 정든 고향집보다 더 아늑하게 그리운 곳도 없습니다. 고생이 많고 시련이 크면 클수록 고향은 더 간절하게 그리워집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처음 조상 때부터 계속해서 나그네 길을 걸어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을 버리고 사막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뒤에 그의 후손이 에집트에서 사백여년의 노예 생활을 했고 시나이 반도에서는 사십년의 방랑 생활을 했으며 바빌로니아에 끌려 가서는 오십년이 넘는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서기 70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한 뒤에는 장장 이천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고국에 정착하려는 유대인들의 염원은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도 더 간절하고 더 애틋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이사야35, 1~6:10)는 바빌론 유배시의 이야기입니다. 기원 전 590년경에 유대인들은 5천리나 멀리 떨어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서운 징벌이었으며, 이젠 다시 고국에 돌아갈 희망조차 없었습니다. 나라는 망할대로 망했으며 백성들의 민족 정신도 쇠퇴한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는 포로생활에 짓눌려 있는 유대인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해 폐허가 된 유다의 사막과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될 것이며 꽃과 열매가 풍성할 것이고 겁에 질리고 고통에 찌든 백성들에게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광스럽게 고국에 돌아 가는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이 직접 찾아 오실 때에 이루어집니다. 소경은 눈을 뜨고 벙어리는 입을 열며,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뛰어다니게 됩니다. 소경에게 오직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눈을 뜨는 것입니다. 벙어리에게 오직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절름발이는 정상적으로 걸어 다니는 것이 제일 큰 꿈일겁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오시면 그 모든 소망이 다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은 예수남께 사람을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냐고 물어봅니다. 요한은 그때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자신은 이제 죽을 것이 뻔한데 모두가 애타게 기다렸던 메시아가 정말 예수가 맞는지 어쩐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어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내가 메시아다』또는『아니다』라는 명쾌한 대답은 하지않습니다. 다만 요한의 제자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자기 스승에게 전하도록 일러줍니다. 그것은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뛰어 다니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죽은 사람까지 살아나는 아주 굉장한 사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와같은 사건들을 보여주고 들려주셨느냐. 그것은 이사야가 이미 수백년전에 예고한 하느님이 직접 찾아 오시는 현상의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로 메시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옛날 예언자들이 말한 메시아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 주심으로 확신케 했던 것입니다. 요한 그 제자들은 이사야서 35장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덧붙이시기를『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도 의심 했으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의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을 의심하며 메시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그들 신앙의 모순입니다.
우리는 지금 메시아시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을 기다리는 것은 하느님이 직접 인간으로 찾아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은 마지막 날에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께 대한 기다림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는 날은, 죄로 병든 우리 모두에게 참된 구원의 날이 됩니다. 해방의 날이 됩니다.
여러분에게 오직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꿈이 있다면 그게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바로 그 소망과 꿈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참된 평화와 행복은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찾아야 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불구자들입니다. 돈만 알고 세속에만 깊이 빠졌던 병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절름발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떠돌이였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제멋대로 헤맸던 방랑자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립시다. 고향같은 하느님을 애타게 찾아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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