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상징은 버드나무였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자 당대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을 맞아 처형했는데 뿌리만 내리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버드나무처럼 순교자들로 말미암아 신앙이 더욱 굳건해졌기 때문이다. 역시 나무는 우리 신앙선조들의 삶에도 밀접하게 함께해온 존재였다.
한국 최초의 포도나무는 신앙선조들의 노력으로 꽃피웠다. 권철신의 제자인 윤유일은 성격이 온순하고 입이 무거워 북경에 밀사로 여러 차례 파견됐던 순교자다. 그는 1790년 북경에서 구베아(Gouvea) 주교에게서 훗날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필요한 성작, 제의 등을 받아오면서 포도나무 묘목과 재배법을 배워왔는데 이 포도나무가 바로 한국 땅에 최초로 심겨 열매를 맺은 포도나무가 됐다. 1794년 말 윤유일은 지황, 최인길 등과 함께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모셔와 1795년 4월 5일 조선 첫 부활절 미사가 봉헌됐는데 이때 윤유일이 재배한 포도로 담근 포도주가 한국 최초의 포도주로 성혈로 축성됐다.
교우촌에는 늘 감나무가 있었다. 기록에 의존해 산속에서 자취를 감춘 교우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깊은 산속에서 보기 힘든 감나무가 한자리에 모여 있으면 그 근방이 교우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앙선조들은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산속에서 살며 구황식품으로 감을 말려 곶감을 먹었다. 경북의 사도라고도 불리는 강 칼레(Calais) 신부의 선교체험기에서 순교자와의 일화를 기록한다. 병인박해를 피해 한실 교우촌을 향하던 칼레 신부는 위험을 염려해 눈물을 흘리며 칼레 신부를 혼자 보내려 하지 않는 박상근을 억지로 돌려보내는데 이때 눈물 속에 헤어지며 나눴던 것이 바로 마른 과일, 곶감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나무는 신앙선조들에게 생을 돌보기도 했지만, 순교자들의 죽음에 함께한 것도 역시 나무였다. 해미읍성의 옥사 앞에는 호야나무(회화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가 순교자들의 고통을 간직한 채 서 있다. 이 나뭇가지에는 아직도 철사가 박혀있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데 바로 순교자들의 손발을 묶고 철사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했던 흔적이다.
2000여 명의 순교자가 순교한 수원 토포청 앞에는 커다란 미루나무가 숲을 이뤘다고 한다. 관리들은 본보기로 보이기 위해 이 미루나무 위에 처형한 순교자들의 시신을 매달았다고 전해 내려온다. 이 모습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아직도 수원성지 인근에는 “무당질을 하더라도 천주학쟁이만은 되지 마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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