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가 설정 50주년을 맞았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는 보편교회의 신앙의 해와 교구 설정 50주년이라는 희년의 겹경사를 맞은 교구민들의 영적쇄신을 기도하며 기획 ‘수원교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재한다.
기획은 윤공희 대주교, 김남수 주교, 최덕기 주교로 이어지는 교구의 과거와, 교구민이 당면한 현실을 진단하며, 섬김운동과 영적쇄신의 장을 만들어갈 교구의 미래를 짚어본다. 새 복음화를 실현하기 위한 미래에 있어 가톨릭신문 수원교구는 소공동체와 가정, 사회복음화 등의 현장을 취재할 예정이며, 그 가운데 살아있는 성체신심과 성모신심, 순교신심을 통한 영적쇄신의 방향을 모색한다.
■ 윤공희 대주교 시대(1963~1973) : 교구 공동체의 쇄신
1963년 수원교구가 설정되고 초대교구장으로 착좌한 윤공희 대주교. 당시 교구는 농촌이 대부분이고 방인 사제로만 구성돼 있어 외부의 지원이 없고 경제적 자립도 매우 약한 상태였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고 그 이후 교회는 ‘평신도가 교회의 주체’라는 명제 아래 평신도 사도직을 적극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윤 대주교 또한 자립을 위한 신자 재교육과 평신도 사도직을 강조하며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이하 평협) 결성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신생교구로서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교구장과 사제들의 일치 속에서 신자들의 신앙의 기초를 다져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매끼 한 숟가락씩 성미 모으기 운동’ 등을 통해 각 집마다 쌀 모으기 운동을 위한 쌀자루를 따로 두어 신학생 양성 기금을 마련했던 시절이었다.
윤 대주교는 “공의회는 방향만 제시했고 구체적인 사안들은 노력과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했다”며 “교육을 중심으로 평신도들의 능동적인 참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회고했다.
윤 대주교의 말대로 1972~1974년 교구는 평신도 교육 3개년 계획을 실시하고 제1대 회장에 조성지(프란치스코)씨를 선출한다. 평협 탄생 이후에도 윤 대주교는 교구 평협과 본당 사목협의회 간의 유기적 관계를 고민하며 신자들에게도 책임의식을 심어주고 그 성격을 분명하게 해야 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이러한 고민을 안고 그는 활발한 사목방문을 시도한다. 매년 4월 즈음부터 두 달 동안 집중적으로 사목방문을 하며 매번 본당(24개)을 순회하고 견진성사도 집전했다. 아무것도 없던 교구의 기틀을 놓고, 기초를 닦으며,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열성적인 노력을 지속한 것이다.
■ 김남수 주교 시대(1974~1997) : 교구 공동체 활성화
윤공희 대주교가 교구를 정립하고 평신도 사도직의 개념을 강조하며 교구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김남수 주교는 급속하게 도시화되는 교구의 미래를 예견하고 사제 양성과 새 본당 설립, 생명 운동, 나누는 교회 등을 지향하며 교구의 여러 부분을 풍성하게 이끌었다.
김 주교의 부임 당시 교구는 31개 본당, 신자 수는 6만7000명이었다. 임기 가운데 최덕기 주교가 설립한 성당까지 모두 100개를 채울 정도로 새 신자들에게 넉넉한 공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 김 주교는 부단히 노력했다. 서울이 포화상태가 되고 교통이 발달하며 많은 신자들이 수원교구로 이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적 팽창에 발맞춘 노력과 함께 교구는 질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한국교회가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거듭나던 전환의 흐름, 그 가운데 김 주교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윤 대주교의 뒤를 이어 교구의 경제적 자립을 꿈꾸면서도 한국외방선교회를 육성, 제3대 총재직을 맡았으며 중국교회와의 결연과 아시아 지역 선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또한 교구 내 사회복지 발전과 수도회와 성지 발전, 사형제도 폐지와 낙태, 저출산 문제 등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으며, 교구는 2004년 그의 유지를 받들어 생명 수호와 가정성화를 향한 사목적 지원을 위해 ‘안젤로 생명사랑회’를 만들기도 했다.
이외에도 수원가톨릭대학교를 설립해 사제 양성에 주력했으며, 교구청 업무와 조직의 규모에 맞게 수원시 장안구 정자동에 새 교구청사를 완공하고 이전시키기도 했다. 교구 공동체의 다양한 부분을 활성화시킨 김 주교는 1997년 은퇴, 2002년 선종했다. 그가 남긴 회고록을 통해 우리는 교구의 역사는 물론 교구에 끊임없이 보내는 그의 남다른 애정을 찾아볼 수 있다.
“수원교구는 아직 발전도상에 있으니 주교님도 그렇고 신부님들도 그렇고 할 일이 많다. 하느님 안배에 맡기고 신부님들이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새 주교님을 도와 수원교구를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최덕기 주교 시대(1997~2009) : 시노두스 과제의 실현
최덕기 주교는 1998년 새해를 맞아 첫 공식 행사로 원로 신부들과의 만남 시간을 가졌다. 사제 수품 25주년 이상을 지낸 원로 신부 30여 명을 초청한 자리였다. 교구 운영을 위한 각종 방안과 사목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힘이 되는 조언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다.
최 주교는 “교구의 나아갈 방향과 실천사항을 총체적으로 나누고 확정할 수 있는 대표적 장으로는 시노두스를 소개할 수 있다”며 “2000년 대희년 준비뿐 아니라 교구 설립 이후 처음으로 여는 시노두스 준비로 분주한 일정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대희년을 앞두고 교구는 시노두스 의제를 선정해야 했고 제1차 시노두스(1997년 10월 9일~2001년 10월 11일)를 통해 미래의 새 복음화를 위한 중점 과제를 구역과 반 공동체의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의 활성화 등에서 찾았다.
전교구민에게 시노두스에 대해 알리는 교육도 철저히 준비해야 했다. ‘자! 일어나 함께 가자’라는 교구 시노두스 로고의 글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동참한다는 뜻과 더불어 죄악으로 얼룩진 세상에 희망과 비전을 제시한다는 새 복음화의 시작이었다.
‘구역과 반 공동체의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라는 의제는 각각 본당의 도시화와 대형화 현상에 따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자 미래교회의 주인공인 청소년들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의 징표들은 교구 시노두스를 통한 구체적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교구에 활력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미래를 준비하는 복음화 전략과 맞닿아 있었다.
2006년 실행된 대리구제 또한 최 주교가 이룬 하나의 큰 변화였다. 최 주교는 대리구제를 채택하는 교령을 반포하고 교구를 수원, 성남, 안양, 평택, 용인, 안산 등 6개 대리구로 분할한다. 교구민들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대리구제를 통해 지역별 특성에 맞는 다양한 사목이 활성화되기를 바랐다. 현재까지도 대리구제는 자리를 잡아가는 시점에 놓여있으며 대리구 단위의 다양한 행사와 친교, 연대가 이뤄지고 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