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와 교계제도’를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교계제도 설정 50주년을 한국교회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데 공감대를 이뤄냈다. 아울러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실천적으로 드러낼 때 ‘친교의 공동체’로서 올바른 교회상을 구현해 나갈 수 있다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는 이날 행사에서 인사말을 통해 “교회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사건 중 하나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린 해에 한국교회가 교계제도 설정을 통해 함께 새롭게 출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면서 “하느님께서 우리 시대에 던져주시는 뜻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계기가 되길” 기원했다.
■ 제1 주제 : 세계교회의 흐름과 교계제도의 설정 - 조현범(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포교성성, 선교지역 자립 위해 노력”
▲ 조현범 연구원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은 포르투갈 국왕 세바스티안의 요청을 받아들여 1576년 1월 23일 칙서 <수페르 스페쿨라(Super Specula)>를 반포하여 마카오에 정식으로 주교좌를 설치하여 말라카교구로부터 독립시킴으로써 동아시아 지역에 포르투갈 국왕의 보호권이 행사되는 정식 교구가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보호권 제도는 교황청이 애초에 의도하였던 선교의 수단으로 기능하기보다는 군사 정복을 정당화하거나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보호권 제도의 폐해가 점점 심각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622년 포교성성이 설립되면서 비서구 지역에서의 선교활동을 교황청이 직접 관할하기 위한 조치들을 강구했다. 대목구 제도를 운영하려는 포교성성의 방침은 보호권 하의 교구들이 행사하던 재치권을 축소하고 나아가서 보호권 교구들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포교성성은 선교지역에서 현지인 성직자들이 양성되어 자립적인 지역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포교성성의 탈보호권 선교정책은 동아시아 지역의 천주교에서 교계제도를 축소 내지 폐지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동아시아 전체로 보면 보호권 교구가 아니라 교황청에서 직접 교구장을 임명하는 교구의 설정이 실현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의 일이다.
■ 제2 주제 : 교회법에서 본 교계제도 설정의 의의 - 김효석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
“온전한 개별교회 형태 갖추게된 것 의미”
▲ 김효석 신부
1962년까지 한국교회에는 아직 관구가 설립되지 않았다. 이는 한국에는 온전한 의미의 개별교회들이 설립되어 있지 않고, 각 대목구가 온전한 자치권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없었던 전쟁 후 상황을 반영한다.
대목구장들은 어느 선교 지역에서 교황을 대리하여 사목 책임을 맡은 이들이었기 때문에 특정 교구의 통치권을 갖지 못하였던 것이고, 그래서 비록 주교품을 받았지만 명의 주교(名義主敎, Episcopus titularis)였다.
대목구가 교구로 승격되었다는 것은 준(準) 개별교회에서 온전한 의미의 개별교회가 되어, 그 안에서 보편교회를 드러내고 실현할 수 있는 하느님 백성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법적 측면에서 정식 교계 제도가 설정되었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교구들이 온전한 개별교회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 개별교회들이 연합체인 관구를 형성하여 관구장의 영도 아래 교구 간의 상호 협력과 공동 사목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또한 교황을 대리하여 사목 책임을 맡던 대목구장 주교들은 명의 주교에서 개별교회의 교구장 주교가 되어 고유하고 직접적인 직권으로 사목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 제3 주제 : 교계제도 설정에 대한 한국교회의 인식 - 양인성(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정신적 자립 인정해 교계제도 설정”
▲ 양인성 연구원
당시 교계 언론들은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 ▲한국교회의 장한 역사와 순교 신앙 ▲한국교회의 활동에 대한 높은 평판 등을 교계제도 설정의 배경으로 정리하고 있다.
교계제도 설정 소식이 알려진 후 일반 언론뿐만 아니라 교계 언론에서도 대주교 임명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교황청이 한국교회가 아직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음에도 교계제도를 설정한 이유는 물질적(경제적) 자립보다 정신적 자립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한국교회는 정식 교구가 세워졌음에도 포교성성의 관할 하에 있는 것은 사실상 선교지역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황청이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을 포함하는 한반도 전역에 교계제도를 설정한 것은 남북 분단을 임시적인 것으로 보고, 한국의 통일을 바라며 깊은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평가됐다. 또한 교황청이 1948년 유엔 총회의 결의안을 준수하여 대한민국 정부 하의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교계제도를 설정한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북한 교구의 설정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교계제도 설정 50주년이 되는 현재에도 남겨진 문제들이 있다. 한국교회가 지금도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옛 포교성성)에 속해 있다는 점과 북한교회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여전히 낮다는 것이다.
■ 제4 주제 : 교계제도 설정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 오세일 신부(서강대학교 교수)
“서울대교구 신자 수 50년 간 10.5배 증가”
▲ 오세일 신부
지난 50년간 서울대교구의 남자 수도자는 6.5배, 여자 수도자는 3.6배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수는 전국 수도자 비율과 비교하면 현격히 떨어진다. 이 시기 한국교회에 소속된 남자 수도자는 182명에서 1521명으로 8.4배 증가하고, 여자 수도자는 1170명에서 1만146명으로 거의 9배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 서울대교구가 보여 온 놀라운 변화상의 근본적인 원동력을 한국교회의 내면적인 의식과 주체적인 역량에서만 찾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외생적 요인들로 ▲한국 사회의 변화라는 사회 환경적 요인에 대한 교회의 대응 ▲한국 종교계의 지각 변동으로 인한 종교 환경적 요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인한 신학적 성찰 요인 등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서울대교구는 지난 50년 간 사제 수는 7배, 평신도 수는 10.5배 증가했지만 교회의 기본 단위 공동체인 본당의 숫자는 3.5배만 증가했기 때문에 교회의 대형화 현상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2011년 현재 서울대교구의 본당 단위당 평신도의 평균 수는 6350명에 이른다.
현재 서울대교구가 보이고 있는 교세 성장의 한계 상황은 ▲본당 공동체의 대형화를 비롯해 ▲교회 사목자의 행정 관료화 ▲소공동체 활성화 문제 ▲교회의 중산층화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도전 등을 꼽을 수 있다.
하느님 백성들 중에서 누구도 눈물 흘리지 않도록,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실천하며,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함께 소통하고 함께 땀 흘리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자유와 사랑의 여정을 걸어갈 때 새로운 도약과 쇄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