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경기도 미산리에 자리한 미리내성지를 순례하던 신자들의 눈길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쏠렸다. 그늘도 없는 호젓한 길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는 무리 중에는 금발의 소년소녀들도 눈에 띄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이들의 몸짓에서는 간절함마저 배어 나왔다.
이날 미리내성지를 찾아 신앙의 열기를 드러낸 이들은 다름 아닌 서울 용산에 위치한 주한 미 제8군사령부 소속 성가정본당(주임 마이클 알바노 신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군인 및 군무원 신자와 그 가족들.
성지 순례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사령부 영내에 모인 이들은 100여 명. 이들은 일찌감치 성지를 찾아 김대건 성인의 묘소를 비롯해 ‘16위 무명순교자 묘역’,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高) 우르술라 묘소,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 성모당 등 경내 곳곳을 돌아보며 한국교회의 신앙을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들에게 미리내성지는 이미 잘 알려진 한국의 대표적 성지다. 그도 그럴 것이 성가정본당 공동체가 처음 미리내성지 순례에 나선 것이 지난 1995년 4월이니 올해로 18년째다. 당시 미군 꾸르실료와 인연을 맺고 봉사를 해오던 유봉현(카타리나·65·서울 성산2동본당)씨 부부가 몇몇 미국인 신자들과 성지를 오가던 것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제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미리내성지를 오가는 순례는 성가정본당의 빼놓을 수 없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사령부에서 일하는 신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1, 2년이면 수시로 근무지가 바뀌는 바람에 새로 전입해오는 신자들에게 미리내성지는 생소한 곳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미리내성지가 이들에게 가장 친근한 성지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김대건 성인에 대한 신자들의 이해가 바탕이 됐다. 본당 차원에서 신자들에게 자신들이 근무하는 한국의 가톨릭교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더할 수 있는 교육을 하다 보니 그 가운데 빠짐없이 등장하는 존재가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된 김대건 성인이었다.
본당 차원의 지속적인 관심과 교육은 신자들의 영성에도 새로운 불을 지펴 시간이 날 때마다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김대건 성인 관련 사적지를 비롯한 한국의 성지를 순례하는 열성적인 신자들까지 생겨났다.
이날 성지 순례에 함께한 탐 와이트(55) 사비나 연진(58)씨 부부는 “말로만 듣다 처음 미리내성지에 오게 됐는데 놀란 점도 많고 마음에 와닿는 부분도 많았다”면서 “성지 관리에 좀 더 힘을 기울인다면 더 많은 이들이 와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갈 수 있는 곳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이크 디마틀레오(52)씨 부부는 “다시 오고 싶은 성지”라며 “이번 순례를 계기로 기회가 되면 한국의 더 많은 성지를 돌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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