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의 노사제는 따뜻한 눈빛을 지닌 촌로가 되어 사람들을 맞고 있었다.
올해로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은 김수창 신부(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활력으로 하루하루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모두가 주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지상에서의 쓸모를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입니다.”
6·25전쟁 때 홀로 북에서 내려와 사제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후 오늘까지의 모든 것을 주님의 은총이라고 말하는 김 신부는 ‘함께하는’ 믿음의 여정을 강조했다.
“삶이 공허하다고 느껴지는 건 하느님과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신다면 무슨 일이 두렵겠습니까.”
자신이 확신에 차있기에 주위에는 늘 기쁨에 넘치는 일들이 그득한지 모르겠다. 어느 사목지를 가더라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첫 주임을 맡은 왕십리본당 재임시절에는 가난해서 본당 유치원을 이용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신자가정을 위해 무료 유치원을 열기도 하고, 홍제동본당에 가서는 장례조차 치르기 힘든 판자촌 신자들을 위해 한국교회 최초로 성당에 영안실을 만들어 가톨릭 상장례 토착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잠원동본당에서는 본당 내 의사·약사·간호사·호스피스 봉사자들로 방문간호를 조직화해 본당 사회복지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서울대교구 사목국장으로 재임할 때 어려움을 겪던 소신학교를 폐지하고 예비신학생제도를 도입한 것을 비롯해 평신도 성체분배 봉사제도를 만든 것도 김 신부의 따뜻한 눈길이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신학생들과 매년 도보성지순례에 나서 순교신앙을 되새기도록 한 일도 그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엿보게 한다.
“저 혼자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신 이들이 모두 제 몫을 잘해주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저 그들을 칭찬하고 북돋워준 것밖에 없습니다.”
욕심이 없어 보이는 듯한 그도 사목활동에 대한 욕심만은 여전하다. 지난 2003년 사목일선에서 물러난 후 경기도 여주 운촌리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소소한 농사를 지으면서도 인근 수도회 일을 돕는 것은 물론 지역본당 등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1933년 10월 18일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출생한 김 신부는 1962년 12월 사제품을 받았다. 독일 유학 후 왕십리본당 주임,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홍제동·명동본당 주임, 절두산순교성지 기념박물관장 및 순교자현양위원회 위원장, 한국교회사연구소 재단이사장 등으로 봉직한 후 2003년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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