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핵심을 뽑아 명료히 답하십니다. 평생 인간이 만든 율법의 세부조항에 얽매여 긴장하고 염려하고 노심초사하며 지내던 이들에게 적잖은 위로의 메시지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질문을 드렸던 율법학자도 그분 말씀에 기가 살아났던 듯싶습니다. 홀가분한 마음에서 “훌륭하십니다”라고 맞짱을 뜨며 한술 더 떠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라는 현답을 드렸을 것도 같습니다.
문득 이스라엘인들이 수많은 계율을 만들어낸 이유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도록, 그분만을 섬기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조처였다는 사실이 생각납니다. 그것은 선조들의 치욕적인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단단히’ 반성한 결과였으며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이방인에게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온 백성들을 위한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심히 아름답고 귀한 의도에서 세부조항을 덧달아댔던 셈입니다.
하지만 사랑이신 그분을 부각하지 못한 613 조항들은 그들의 삶을 옥죄는 형틀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사랑이 아닌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초점을 맞춘 일이 가장 큰 잘못이라 짚어져, 심히 애석합니다.
일상 속에서 일거수일투족이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저렇게 하면 그르다’고 지적을 당했으니, 그들의 매일 얼마나 고달팠을지 짐작이 됩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사소한 일상의 지침들이 이렇게 수없이 복잡하니, 하느님께서 이르신 계명의 정신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을 것이라 가늠하게 됩니다. 이야말로 적극 선을 행하라 명하시는, 먼저 사랑하기 원하시는 하느님의 의중을 잃은 빌미라 짐작되어 안타깝습니다.
사실 그날 주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모세는 하느님 계명의 속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물론 ‘이웃사랑’에 관한 설명도 상세히 기록해 두었습니다(신명 24,14-25 참조). 그들은 동족뿐 아니라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10,18)라는 명령을 모르지 않았을 터입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선포하신 사실도 알았을 것입니다(시편 68,6 참조). 당시 하느님의 계명을 줄줄 꿰던 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지식을 자신이 아닌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일에 사용했기에 주님께 큰 질책을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이 ‘사랑’의 계명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결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는 가르침으로 듣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하느님을 압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에페 1,4-5) 사실을 압니다. 사랑을 철저히 실천할 것을 명하신 그분의 의중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여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지냅니다. 이 때문에 늘 그분처럼 사랑하며 살아가길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며 기도합니다. 진실로 그분의 뜻을 행할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못 합니다’.
참으로 말씀대로 살고 싶고 그래서 애도 써보는데 ‘정말 안 되더라’는 얘깁니다. ‘너무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9)라는 말씀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족합니다.
따져보면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천국 백성이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전혀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로마 3,27 참조).
세상에는 초지일관 사랑만 할 수 있는 능력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이 모자람이 안타까워 주님이 오셨습니다. ‘영구한 사제직’을 맡으시어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백성’(로마 10,21)을 구원하시며 온종일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스스로 사랑을 살아낼 재간이 없는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티토 2,14)으로 빚고 계십니다. 그 은총을 입어, 우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며 지내는 것, 너무나 큰 은혜의 흔적입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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