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늘 갈 수 있는 곳, 우리가 없으면 우리를 그리워하는 곳, 우리가 죽으면 슬퍼해주는 곳,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18년 전 사제 서품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몇몇 신부들과 함께 제주도로 휴가를 떠났다. 바쁜 보좌 생활을 마치고 곧 있으면 본당 신부로 발령받는다는 기대와 함께 모두 들뜬 마음으로 제주도 여행길에 올랐다. 저녁 늦게 제주공항에 내린 우리 일행은 자가용을 빌려 목적지인 중문단지로 1,100고지를 넘어 달려가는데 너무나 배가 고팠다. 가는 도중 여러 식당을 지나쳐 갔지만 마땅하게 들어갈 만한 집을 찾지 못하던 중 누군가 ‘아바이 순대’ 라고 간판을 읽어 내리는 순간 차는 어느새 순댓집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순대 2접시를 시키고 서로 휴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수다를 떨고 있는데 큰 접시 가득히 먹음직스러운 순대가 밥상에 놓였다. 아바이 순대는 아버지의 함경도 사투리로 돼지 창자에 찹쌀밥을 넣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친구들이 한 명도 순대를 먹지 않고 그저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다. “왜 안 먹느냐?”는 질문에 하나같이 안 좋아한다는 대답뿐, 아무도 먹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5명의 친구 모두가 순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만 늦은 시간 배고파하는 동료 친구들을 위해 나 하나만 양보하면 모두가 잘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그만 ‘아바이 순대’집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별로 좋아하지 않는 순대를 한 개씩 입에 물고는 웃으며 순댓집을 빠져나왔다.
이렇게 보좌 신부 시절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가득했던 우리 동창 신부들이 10주년을 맞이해 다시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출발할 때부터 어떻게 보낼 것인지 각양각색의 의견이 분분했는데 낚시팀, 운동팀, 스쿠버팀, 관광팀 등으로 나눠 밤늦게 한적한 펜션에 여장을 풀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밥을 먹어야 하는데 큰일이 났다. 성게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는 친구, 호텔 아침 뷔페가 괜찮다는 친구, 저녁에 술 한잔했으니 해장국 집을 찾아야 한다는 친구까지 너무 의견이 분분하여 도저히 함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아침을 각자 알아서 해결하기로 했고 여행 내내 각자 변해 버린 까다로운 입맛 때문에 식사 때만 되면 의견 통일을 보지 못해 곤욕을 치러야 했다.
보좌 시절, 서로 배려하여 ‘아바이 순대’집으로 말없이 들어섰던 모습들은 사라지고 각자 자신들의 취향과 입맛을 주장하다가 아침부터 헤매야 하는 모습에서 세월을 느꼈다. 홀로 사는 사제들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쓴웃음을 짓지만 결국 자기중심의 삶이 이렇게 독선적이고 이기적이게 만든 것이다. 그 한 끼 친구 신부들을 위해 자기 입맛을 포기해도 좋으련만…….
그런데 아마 부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혼하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서로에게 맞추어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던 결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기중심으로 바뀌고 남편이나 아내의 입장보다 하나부터 열까지 오로지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하는 독불장군으로 변한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심은 사라지고 드러난 문제에 대한 동기나 과정은 무시하고 그저 결과만으로 서로를 판단하며 식어 버린 사랑 타령으로 느는 것은 술뿐이다.
서로 함께 산다는 것은 닮는 것이다. 입맛도, 습관도, 체질도 서로를 위해 바뀌어 가는 것이 부부들의 삶이다. 너를 위해 나의 식성을 양보하고 음식 맛을 맞추어 가는 것이 하나 되는 부부들이다. 사제는 독신으로 지내며 맞추어 갈 대상이 없어 평생을 자기 입맛을 고집하며 살지만, 부부는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 입맛을 맞추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서로에게 익숙한 나머지 아무런 긴장을 하지 못하고 지극히 편안한 관계로 로맨스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그건 권태기를 조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들은 가깝지만 늘 새로운 입맛으로 서로를 즐겁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부들이여! 긴장하고 또 긴장하라…….
가정/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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