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4시40분. 세상은 아직 가을이지만 수도원에는 이미 겨울이 시작됐다. 매서운 산바람에 단단히 옷깃을 여미고 50m 정도 떨어진 성당을 향해 걸었다. 아직 개시하지 않은 수도원 담장 밖 세상은 어둡고 고요하기만 하다. 잎을 반쯤 덜어낸 배나무 가지만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안내등을 따라 돌계단을 오르다보니 우거진 나무 틈 사이로 성당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빛이 푸른 새벽과 대조를 이루며 홀로 빛나고 있다.
성당 안에는 이미 검은색 수도복을 입은 수사들이 제대를 중심으로 양옆에 일렬로 자리했다. 성당 뒤편에는 열댓 명의 신자들이 눈을 감고, 곧 있을 아침기도를 경건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룩한 분위기에 압도돼 돌계단을 오르느라 가빠진 숨소리를 급하게 가다듬었다.
오전 4시50분. 시작을 알리는 수도원 원장 신부의 나무 종소리가 성당 안을 두 번 울렸다. 반주 없이 시작된 그레고리안 성가가 성당 안에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오늘도 변함없이 수도원의 하루는 시작됐다.
하느님과 만나다
고해소를 나온 장재희(모니카·46)씨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1시간 넘게 진행된 면담 형식의 고해성사에서 그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며 “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말했다.
“신앙생활 하면서 오늘만큼 행복한 시간이 있었나 싶어요. 마음속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외면했던 제 아픔을 마주할 수 있었어요. 나 자신과 화해하고 나니 그동안 용서할 수 없었던 다른 이들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어요.”
장씨의 경우처럼 피정 참가자들은 피정 기간 중 원장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다. 참가자들은 면담 형식으로 진행되는 고해성사를 통해 영혼의 깊은 치유를 경험한다.
요셉 수도원 피정은 특별하게 마련된 프로그램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기상과 수면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고 기도 시간이라고 울리는 종도 없다. 대신 수도원 곳곳에는 수사들의 일과표가 붙어 있다. 오전 4시50분 아침기도를 시작으로 오후 7시45분 끝기도까지 기도와 노동이 번갈아 진행되는 촘촘한 일정이다. 참가자들은 자율적으로 수도원 일정에 몸을 맡긴다.
수도원을 찾은 지 8년 됐다는 김희원(데레사·42)씨는 “자율적으로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하다”고 말했다.
“가능한 한 피정 기간 동안 수사님들의 일정에 함께하는 편이에요. 침묵 속에서 기도하고 일하는 수사님들의 모습을 통해 제 삶을 성찰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 요셉 수도원 피정 프로그램은 특별히 짜여져 있지 않다. 오전 4시50분 아침기도를 시작으로 오후 7시45분 끝기도로 마무리되는 수도자들의 일과에 자율적으로 참여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할 수 있으며, 고해성사도 받을 수 있다.
자연과 만나다
수도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위치하고 있다. 불암산을 병풍 삼아 1000그루가 넘는 배 밭을 품고 있다. 수도원의 대지는 약 6만6115m²(2만여 평) 정도. 그중 약 1만3000평이 배 밭이다. 점심식사 후 수도원 산책에 나섰다. 복잡하고 분주한 도시에서 느끼지 못하는 평온함이 찾아왔다. 햇살을 머금은 불암산 회색 암벽을 마주 보고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느라 분주한 산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걸었다.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 흙 부서지는 소리가 낯설다.
“수도원에서는 도시에서 맡을 수 없는 흙냄새가 있어요. 요즘 사람들 하루에 몇 번이나 흙을 밟을까요? 피정에 온 분들 마음껏 흙 밟으시라고 일부러 비포장도로로 남겨놨죠.” 정훈만 수사의 설명이다.
1박2일 일정으로 피정의 집을 찾은 이준표(프란치스코·45)씨는 “속세를 떠나 자연의 품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산책하다 보면 많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요. 조용히 나를 돌아보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수도원 내 피정의 집과 성당 사이에는 100m 정도의 배나무 길이 있다. 길 양쪽으로 나무들이 뻗어낸 가지가 만든 자연 터널이다. 피정 참가자들은 모든 전례와 기도생활이 이뤄지는 성당에 오기 위해 이 길을 지난다. 미사를 포함해 하루 7번 정도의 기도시간이 있으니 14번 정도 이 길을 지나는 셈이다.
많은 피정 참가자들은 이 길을 걸으며 기도하고 묵상한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주변 배나무에서 열리는 배가 크고 맛이 좋다고 한다. 정 수사는 “기도를 먹고 자란 배라 그런가 보다”라며 웃어보였다.
▲ 수도원 내 피정의 집과 성당 사이에는 100m 정도의 배나무 길이 있어, 피정 참가자들은 모든 전례와 기도생활이 이뤄지는 성당에 오가며 하루 14번 이 길을 지나게 된다.
◆ 인터뷰 - 요셉 수도원 원장 이수철 신부
“하느님 중심 두고 기도할 때 삶은 더 이상 짐 아닌 선물”
교회의 전례·피정도 결국은 ‘힐링’
절제된 생활에서 기도·묵상하며
영혼 쉴 수 있는 환경 만들어줘야
▲ 이수철 신부
‘배 밭 수도원장’ 이수철 신부는 올해로 설립 25주년을 맞이한 요셉 수도원에서 24년간 살았다. 그는 그동안 피정의 집을 찾은 수많은 신자들을 만나왔다. 이 신부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자 수도원을 찾는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폐해로 삶은 전쟁터가 됐습니다. 무한 경쟁시대 속에서 공존하기보다 남을 짓밟고 일어나야만 하는 거죠. 삶은 점차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고, 상처받은 영혼은 치유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는 잃어버린 나를 찾고,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피정을 제시했다.
“피정을 통해 침묵 속에서 기도하고 자연 속에서 산책하며 몸과 마음을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문제’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치유 프로그램이 줄 수 없는 근본적인 영혼의 치유를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는 더 나아가 각자 삶의 자리에서 스스로 힐링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연의 리듬을 거스르면 몸과 마음에 탈이 나요. 규칙적이고 절제된 생활을 통해 기도하고 묵상하며 영혼이 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더불어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두고 늘 감사하고 기뻐하며 기도하며 살 때 삶은 짐이 아닌 선물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