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회에 불고 있는 ‘힐링’ 열풍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치유의 보물을 찾기 위해 산으로, 들로, 바다로 향하고 있다. ‘힐링’이라고 명명되는 활동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참여한다. 하지만 정작 그 보물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마련이다.
■ 교회와 힐링
최근 몇 년 사이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피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것도 강의식이 아닌 영신수련, 수도원 체험 등 영성과 내면의 성찰로 이끄는 피정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부쩍 늘고 있다. ‘힐링’ 열풍이 교회까지 불어온 것이다.
현대인들은 마음의 위로와 평화를 원하지만 정작 그들이 치유 받을 곳은 마땅치 않다. ‘힐링’을 남발하는 상업주의 때문에 되레 상처 받기 일쑤다. 자연히 교회로 찾아와,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치유를 경험하고자 한다. 가톨릭신문 창간 80주년 기념 신자의식 조사 보고서에서 종교를 갖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41.9%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라고 답한 결과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해가 지날수록 더해가고 있다.
올 초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청년부가 실시한 ‘청년 신자의 신앙생활’ 조사 보고서 결과에서도, ‘신앙이 자신에게 주는 가장 큰 의미’에 대한 답변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응답이 절대 다수인 61.9%나 차지했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교회 내에서는 하느님과 신앙보다는 심리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신자들의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공허하고 각박해진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들을 비난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성프란치스코 CPE 센터장 박재한 신부(작은형제회)는 “안정은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며 “신자들이 힐링을 찾는 이유는 ‘하느님께 목마르다’라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에 교회가 신자들을 심리적 평안으로 안내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역설했다. 또 한 성직자는 “심리적 안정이 없는 상태에서는 ‘신앙심’도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며 우려를 표하면서, 교회가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전했다.
실제로도 신자들은 교회가 주는 ‘안정감’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조스테파니아씨는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을 때 성당 가서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내 마음을 다 알고 계실 거란 생각에 위로가 된다”고 고백했다. 심리적 안정을 찾는 신자들의 욕구는 일부 계층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제는 마땅히 교회가 응답할 차례다.
▲ 최근 몇 년 사이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피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사진은 수원교구 안산대리구 소하동본당 부부피정 참가자들이 포옹하며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 모습.
■ 머무름의 공간, 교회
다행히 2000년이 넘는 교회 역사 안에는 풍성한 ‘치유의 보물’이 존재하고 있다. 성경과 묵상, 성체조배, 성령기도회 등 그 종류만도 셀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보물은 ‘고해성사’다. 요셉 수도원 이수철 원장신부는 “심리상담가가 해줄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인 영혼을 위로해주는 고해성사는 근본적인 치유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라며 “내면의 상처를 열어보고 영혼 깊은 곳에서 하느님과 만나 자연스럽게 위로와 치유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옛말에 ‘정승 판서도 저 싫으면 안 한다’고 했다. 신자들이 고해성사가 가지고 있는 치유의 힘을 직접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리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도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수 있다. 여기서 교회의 역할이 시작된다.
교회는 세상에 시달리는 신자들이 고해성사의 치유를 체험할 수 있도록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이론적으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 고해성사의 보물을 더 많은 사람이 더 깊이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몫이다. 물론 모든 시도는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이뤄져야 한다. 힐링을 남발하는 세태의 흐름에 편승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신앙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지난 10월 ‘신앙의 해’를 선포하고 새로운 복음화를 강조했다. 힐링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는 이 시점에서 ‘신앙의 해’가 공표된 것도 곧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교황을 비롯한 교회 전체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은 바로 ‘머무름’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가장 힘든 상황에서는 항상 산에 올라(마태 14,23) ‘머무름’을 선택하곤 했다. 예수의 삶은 고스란히 현대의 신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피해자 자조모임’을 통해 참가자들의 힐링체험을 지켜본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 위원장 김성은 신부는 “신앙의 핵심은 액티비티가 아니라 머무름에 있다”며 “세상도 바쁜데 교회도 빡빡한 일정의 프로그램을 내놓기보다는 신자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기만 하면 된다”고 전했다.
◆ 특별 기고 / 서울 삼성동본당 주임 심흥보 신부
사랑의 완성을 이루기 위한 고해성사
▲ 심흥보 신부
주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나처럼 사랑을 완전히 이루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랑이 아닌 것이 죄라면, 어떻게 사랑하시겠습니까? 고해성사는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은총입니까? 그리스도교 신앙이 우리에게 말하는 완전한 인간의 삶은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은 마치 자기만족처럼 자기가 좋아서 하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로마 13,8ㄱㄴ) 우리가 인격의 완성에 다다랐다고 인정할 만해서 머리 숙여 존경을 표시할 만한 이들의 공통점은 그분들이 이웃을 향한 사랑을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신의 시간과 재산의 얼마를 쪼개 주는 순간의 행위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는 삶의 태도와 방향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 13,8ㄷ)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것 모두를 다 합친 것을 다 포함하면서도 통합적으로 이루어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지 않고, 사랑은커녕 미움만 앞서는데…….” 우리는 십자가상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분께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사랑은커녕 배신을 당해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함께 살기 위한 조건이 용서인 것처럼,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 용서하는, 아니 용서라는 그 사랑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풀어 주신 것이고, 우리 맘속에 고이고이 심어주신 것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1코린 12,26ㄱ) 가끔은 우리 생각도 바뀌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알코올, 도박, 마약 중독은 일종의 병입니다. 그것은 결심하고, 강한 의지로 노력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병입니다. 암환자를 미워할 수 있습니까? 단지 아프고 괴로운 감정이 들 뿐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 앞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 앞에서, 주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누구도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거꾸로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편 자신의 사정상, 살기 위해서, 마음먹은 만큼 사랑을 다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사랑하는 데 있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채워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