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위안하며 치유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힐링이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참살이’(Well being)라는 말이 하나의 화두처럼 등장하더니 이제는 너도 나도 ‘힐링’에 몰두해 있는 추세다.
그런 면에서 사회 저변의 대부분 분야에서 ‘힐링’은 열쇳말로 등장한다. 음악으로 마음의 평안과 안정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힐링 음악을 비롯하여 힐링 광고, 힐링 뮤지컬, 힐링 음식, 힐링 여행 등 ‘힐링’은 마케팅에서도 첫 자리가 되고 있다. 올 한 해 동안 국내에서 가장 높은 판매고를 올린 도서 역시 힐링이 주제였다고 한다.
그렇게 작금의 한국사회는 힐링 푸드로 하루를 시작하고 힐링 음악을 들으며 출근 하고 사무실에선 휴식 시간에 힐링 명상을 하고 주말에는 힐링 명소를 찾아 길을 떠나고, 은행에 갈 때도 힐링 금융 상품을 이용하는 모양새다. 왜 힐링일까.
■ ‘힐링’을 부르는 사회
끝 모르게 지속되는 듯 보이는 불황의 위기감과 고용 불안, 빈익빈 부익부로 대표되는 극심한 양극화, 그리고 ‘하우스 푸어’, ‘웨딩 푸어’ 등의 신조어를 만들며 증가하는 채무자들, 치솟는 자살률 등 현 한국사회의 표면은 극단으로만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해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 진료비 분석 결과에서는 20대 남성 가운데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진료를 받은 환자가 최근 5년 동안 1500여 명 늘어난 것을 볼 수 있다. 2007년 5034명이었던 스트레스성 질환자가 지난해 6562명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특히 20대 미취업 남성 환자의 경우에는 5년간 47.4%가 늘었다. 20대 청년들의 고질적인 취업난 스트레스를 반영하고 있는 결과라 할 수 있다. 같은 나이 여성들과의 경쟁도 심해지면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정신적·심리적 압박이 신체적인 질환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는 분석이다.
또한 이 결과에서 지난해 스트레스 환자의 4분의 1은 40~50대 여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폐경 등으로 인한 신체적 요인과 함께 남편의 퇴직으로 인한 경제적 불안감 등이 질환의 배경이 됐다는 것이다.
직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그들대로 스트레스에 빠져 있다. 취업포털 C사가 최근 신입 및 경력 구직자 67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신입 93.6%, 경력 78%가 소위 ‘스펙’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했다.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는 “개인주의, 물질주의, 소비주의 등으로 피로 사회가 되어 있는 한국사회 현실에서,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 이에 발맞추지 못해 사회나 공동체에서 도태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힐링’ 현상의 원인인 것 같다”고 의견을 밝혔다.
윤리신학자 김정우 신부(대구관구 대신학원장)는 “‘힐링 신드롬’이라 할 만큼 한국사회가 ‘힐링’에 집착하는 현상은 포스트 모던 시대의 특징”이라고 진단했다.
“현대화의 희생자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볼 때, 현대주의(Modernism) 과학화·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속도의 노예, 변화의 노예로 살며 인간 소외를 체험한 세대들의 삶에 대한 호소이자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자기 찾기 방식”이라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트위터 등 SNS를 통해 끊임없이 메시지를 남기고 이에 대한 지인들의 반응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들도 자신들의 존재감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힐링 추구의 한 방법이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물질적 이기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시점에서 왜 사람들은 이렇게 ‘힘들다, 힘들다, 위로받고 싶다’라고 호소하는 것일까.
김 신부는 이에 대해 “현대화가 주는 유토피아와 신드롬을 좇아서 살아왔지만 그것이 사막의 신기루 같은 존재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은 단지 노예였고 이용당하는 도구였다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오늘의 사람들이 ‘치유’에 목말라하는 것은 그 같은 과정에서 남겨진 후유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힐링’을 추구하면서 수요가 급증하다 보니 ‘힐링’이 남발되는 부작용도 생겨나는게 현실이다.
‘힐링’이라는 무늬만 덧씌운 각양각색의 힐링 마케팅이 넘쳐나면서,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상품들이 어디에선가라도 위로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스트레스 받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 현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은 불황에 대한 위기감, 극심한 양극화 등에 대한 스트레스와 함께 자아 상실의 고통을 호소하며 ‘힐링’에 기대고 있다.
■ ‘힐링’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
현재 한국사회에 퍼져 있는 ‘힐링’의 정확한 의미나 개념은 사실 아직 뚜렷하게 규정되고 있지 못하다.
서구에서는 질병 치유의 대체 요법 또는 영적·심리적 치료 요법 등을 지칭한다고 하는데, 국내에서 통용되는 의미는 아픈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하고 그래서 심신을 새롭게 회복하는 ‘치유’의 뜻으로 뭉뚱그려지는 듯하다. 특히 한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에 쓰여진 ‘힐링’이라는 단어는 이 같은 의미를 각인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전문가들은 ‘힐링’이 대세가 되는 현 시대의 흐름은 결국 포스트 모더니즘 안에서 그 근본을 살펴봐야 한다고 의견을 모은다. 포스트 모던 시대의 대표적인 현상 중 하나인 ‘인간(개인) 중심적 사고’의 특징이 힐링 열풍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우 신부는 저서 「포스트 모던 시대의 그리스도교 윤리」를 통해 “포스트 모던 시대의 인간 중심적 사고의 특성은 종교에 의해서 비롯된 기준에 대항, 개인의 의미를 강조하고 전체를 위해 희생과 봉사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거부하면서 종교나 신앙의 영역에서 말하는 ‘우리’라는 개념을 거부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즉 기존 종교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면서 신흥 종교 같은 무언가 새로운 것이나 인간적 도구를 찾는다는 것이다. 1999년 갤럽 조사에서, 66.6%에 이르는 응답자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를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답한 결과도 개인주의화된 포스트 모던 시대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면 교파, 교리, 진리에 상관없이 어느 종교든 상관없다는 인식을 대변하는 것으로 가톨릭의 많은 신자들이 명상, 좌선, 요가, 기수련 등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풀이다.
‘힐링’에 목말라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은 교회적인 시각에서 볼 때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라는 특성에 따른, 새로운 교회의 몫과 역할’을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교회 내 전문가들은 “삶에 지쳐 쉼을 원하는 이들에게 쉼터가 되어주는 교회의 몫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한 사목자는 “수도원이나 피정의 집은 물론 본당에서도 묵상과 명상의 방 등을 마련해서 ‘나그네’들에게 쉼의 공간을 주어야 한다”면서 “원래 본당(Parochia)이라는 말의 뜻이 나그네 공동체, 나그네의 고향임을 되새겨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