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무라비 법전이 눈을 뽑은 자는 눈을, 이를 뽑은 자는 이를 뽑으라고 외쳤다면, 현대사회 매체의 공식은 살인한 자에게는 죽음을, 바람을 피우는 자에게는 맞바람을 말한다. 폭력과 살인, 불륜 등 자극적이고도 다양한 코드로 버무려진 오늘날 대중매체의 내러티브 안에서 ‘복수’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복수의 세상인 대중매체, 하루하루 흥미로 매체를 소비해버리는 시청자. 이들 모두 불감증에 걸린 것은 아닐까.
■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복수의 세상
가톨릭 신자 A씨가 아침저녁으로 챙겨보는 드라마는 요즘 대세라고 불리는 막장드라마들이다. 드라마에는 불륜과 복수가 빠지지를 않는다. A씨가 지금까지 제일 재미있게 봤다고 손꼽는 드라마는 자신의 친구와 남편이 불륜관계임을 알고 팜므파탈로 변신, 남편을 유혹하고 파멸로 이끈 줄거리의 드라마다. 얽히고설킨 내연관계, 매일 숨 가쁘게 바뀌며 펼쳐지는 처절한 복수의 줄거리를 보는 재미에 요즘 A씨는 일 주일이 재미있다.
A씨가 즐겨보는 드라마는 복수 코드 없이 전개될 수 없는 드라마다. 넓지 않은 인간관계가 얽혀 현대사회의 인간 군상을 만들어내고 복수의 과정에는 정당성이 부여된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으므로 맞바람을 피워도 되며, 살인을 했으므로 가해자의 측근을 살해해도 된다는 논리다.
한국사회에 복수코드를 사용한 막장드라마의 시작이라는 평가를 받은 드라마는 2002년 방영된 ‘인어아가씨’를 예로 들 수 있다. 바람 때문에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에 대해 복수하는 딸의 모습을 그린 이 드라마는 이복동생의 남자를 빼앗아 결혼하는 등 다양한 도덕적 문제를 지적받았음에도 공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2007년 시작해 2008년 막을 내린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은 주인공의 이름이 아예 나화신, 한복수, 이기적, 한원수 등으로 이 줄거리가 복수를 통해 이뤄질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힘인 ‘복수’라는 커다란 전제 아래 불륜과 폭력, 살인 등 자극적 코드를 함께 버무린 매체가 여과 없이 안방 TV로 흘러들어간다는 점이다. 공중파 드라마는 물론 더 자극적인 코드로 무장한 케이블 방송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계속해서 진화하는 매체의 오용을 여실히 보여준다.
최영민 신부(예수회 이냐시오 매체소통 소장)는 “시청률을 우선으로 하는 매체는 자극적 코드를 필요로 하는데 복수를 그 주제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매체 안에서 복수는 정의의 실현처럼 극화되고 시청자들에게는 대리만족의 효과를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 왜 복수극일까
문제는 대중매체가 복수라는 주제로 관객을 동원한다는 점보다 매체에 비춰진 사회가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데 있다. 흔히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 혹은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에 비유되는 매체는 현대사회의 그림자와 사회현상이 그대로 투영된 장치이기 때문이다.
2009년 열린 TV드라마의 위기와 발전방향 토론회 중 ‘TV 막장 드라마의 현황과 발전 방안의 연구’라는 주제 발표에서 당시 오명환 교수(용인 송담대)는 “막장드라마에는 현실 속 극도의 이기주의, 첨예한 양극화, 인간성의 황폐화, 배금주의 팽배 등이 깔려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드라마의 병리현상은 사회적 병리현상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문가들은 복수 코드를 차용하는 매체는 사회 내 지나친 불평등, 결핍된 사회정의와 불안 등이 그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불평등에도 정치적 측면과 경제적 재분배 차원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다양한 원인이 있는데, 이에 따른 현실적 고통을 느끼는 시청자들이 매체를 통해 불안을 표출하고, 쾌감과 대리만족을 얻고 있는 것이다.
최영민 신부는 “우리 사회에 복수 코드가 만연해 있다면 그것은 정의가 사회 안에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방증”이라며 “자기 구제 차원, 즉 스스로의 복수를 단 하나의 해결방법으로 내어놓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뉴욕 필름아카데미를 졸업한 조용준 신부(성바오로수도회 사도직 책임자) 또한 “경제적 재분배 문제와 사회적 불안, 현실적 고통에 대한 대안으로 만들어진 것이 복수”라며 “사회가 미디어를 만들어낸 것이므로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회의 여러 가지 구조적 문제를 투영하는 매체는 더욱 자극적이고 과도한 되갚음으로 시청자들의 갈증을 해소한다. 이러한 매체를 보고 듣는 시청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복수를 정당화하고 예전에는 동의하지 않던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 안에서 이뤄지는 반복적 노출로 인해 비슷한 상황에서 복수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김경희 수녀(성바오로딸회 미디어영성교육팀장)는 “당장은 매체가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나를 둘러싼 매체를 통해 그러한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라며 “청소년과 어린이들에게는 이러한 이론이 훨씬 쉽게 적용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복수의 코드를 담은 영화 ‘친구’를 본 고등학생이 학원폭력에 시달리다 급우를 흉기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하고, 최근에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모방해 임산부를 협박하는 등의 사건도 벌어졌다. 매체가 현실에 대한 사회문화적 규범을 정하고, 나아가 개인의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 복수코드를 담은 미디어 바라보기
부당한 사회현실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는 이상 복수 코드를 담은 매체들은 계속해서 재생산될 것이다.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자극적인 매체의 홍수 속에서 신앙적 잣대는 매체를 가려 시청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다.
사실 성경에서도 복수 코드는 찾아볼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민족의 침범과 재물 약탈 등에 따라 복수하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는 이야기로 화해와 용서를 시작한 것은 신약성경의 예수로부터 출발했다.
조용준 신부는 “예수의 정신은 용서와 화해의 모델이고 이를 통해 진정한 평화로 가는 길을 가르쳐 준다”며 “매체가 줄거리를 전개할 때 복수의 코드를 사용할 수 있지만 치유와 긍정적 방향으로 사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매체에 나타난 복수 코드를 무조건 도외시하는 것 또한 적절한 해결방안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미디어를 끊임없이 모니터링하고 비평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 가운데 볼만한 좋은 미디어를 찾아내어 이용하고 제작하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대중매체를 접할 때는 우선 매체 자체의 특성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바라보되, 자신의 신앙을 통한 매체에 대한 가치 판단, 식별력 등이 필수적이다.
김경희 수녀는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매체와 자신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미디어를 정확히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며 ▲제작자가 주고자하는 메시지를 찾는 객관적 관점 ▲매체를 본 후 자신의 공감과 정서를 돌아보는 주관적 관점 ▲영상기법과 카메라 앵글 등을 파악하고 매체의 상업적 이익을 찾는 비평적 관점 등의 훈련이 동반돼야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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